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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같은 듯 다른 영국살이, 미국살이

입력
2020.06.09 04:30
수정
2020.06.09 14:17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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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외교관을 가장으로 둔 우리 가족은 브라질리아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2017년 2월 시카고로 이사를 갔다. 시카고에 오니 과거에 영국에서 살 때와 유사점들이 우선 눈에 띄었는데, 런던이나 시카고 등 외국 대도시로 나온 한국인들은 대부분 집세가 비싸지 않고 자녀를 위한 우수한 공립학교가 있는 근교에 산다. 런던 워털루역에서 기차로 30분쯤 걸리는 남서쪽 교외 뉴몰든은, 2015년 기준 2만명 정도의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유럽 최대의 한인 타운이다. 비슷한 시기에 9만명 정도로 조사된 시카고 소재 일리노이주 한인들은 여러 개의 타운을 형성하고 있고, 우리 가족이 살게 된 윌멧은 한인 타운과도 가깝고 시내 오길비역까지 기차로 30분가량 걸리는, 시카고 북쪽 미시간 호숫가의 풍요로운 동네이다.

영국과의 유사성도 잠시, 새로운 곳에서의 정착은 역시 힘들고 경이로운 과정이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영어권 국가들인 자국과 미국을 비교하면서, ‘언어 빼고 모든 것이 다 공통적(everything in common but language)’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브라질에서 칼바람으로 유명한 시카고로 이사를 오니, 이불을 사는 것이 급선무였다. 영국에서 이불을 지칭하는 ‘두베’(Duvet)를 찾아다녔는데, 미국에서는 그것을 ‘컴포터’(comforter)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불 사이즈도 싱글(single), 더블(double) 대신, 트윈(twin), 풀(full), 퀸(queen), 킹(king)이 있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하물며 섭씨 영하 15도라는 일기예보에는 집에 칩거할 내가, 미국식 날씨인 화씨 4도에는 무감각하게 외출을 할 위험까지 있다.

영국과 미국의 가장 큰 차이는, 영국은 역사가 길고 영토가 작은 반면, 미국은 역사가 짧고 영토가 크다는 다소 빤한 사실이다. 도시 간 이동거리가 짧고, 고풍스러운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영국과 달리, 미국의 근교에는 쭉 뻗은 일직선의 길과 획일적인 집들, 현대식 쇼핑몰들이 자리 잡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자동차의 위상은 다른 나라들에서는 느낄 수 없던 절대적인 것이다. 서부개척 역사를 배경으로, 그리고 넓은 땅 위에 고립된 주거지에서 법 보다 총이 더 현실적인 방어수단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안전하고 빠른 이동 수단인 자동차는 총과 함께 미국생활의 동전의 양면 같은 위상이다. 미국인들은 장거리를 일일 생활권으로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까워서 걸을 수 있는 거리도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간혹 길에 조깅복을 입고 있는 사람,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 유모차를 모는 사람들이 다니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걷는 이유가 명백해 보이지 않으면, 누군가 집에서 커튼을 살짝 열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내다볼 것이다. 특히 길을 걷는 이가 백인이 아닌 타인종이 되다 보면, 의심의 눈초리는 바로 행동으로 옮겨진다. 한국인 지인들이 산책을 하다가 경찰이 쫓아왔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다. 땅이 넓은 미국에서는 지역별로 인종들이 아예 따로 살고,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시카고의 심각한 총기 사고들도 사우스 사이드 같은 흑인 거주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우리 동네에서 볼 때 피부에 전혀 와 닿지 않는 먼 나라의 이야기이다.

과거에 이런저런 불만을 토로했던 곳들도 걸어 다니기가 어렵지는 않았다고 느꼈다. 결국 새로운 곳에서의 불평은 이전의 익숙한 것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임을 깨달았다. 앞으로 또 다른 곳에 가면, 이미 당연해진 지금의 생활에 비추어 그곳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겠지. 새로운 곳에서의 정착은 적응된 생활방식이 깨지고, 낯선 환경 속에서 새로운 동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여정 속에서 내 시야가 더 넓어지고, 경험은 더 풍부해지고, 판단력은 더 보편적으로 발전하리라는 희망과 위안을 품어본다.

김윤정 ‘국경을 초월하는 수다’ 저자ㆍ독일 베를린자유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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