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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법의 지배, 힘의 지배

입력
2020.06.08 01: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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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H2020052303380001300] <YONHAP PHOTO-1544> 헌화하는 한명숙 전 국무총리 (서울=연합뉴스)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지난달 23일 오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열린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 추도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2020.5.23 [노무현 제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2020-05-23 13:47:54/<저작권자 ⓒ 1980-202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
[PYH2020052303380001300] <YONHAP PHOTO-1544> 헌화하는 한명숙 전 국무총리 (서울=연합뉴스)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지난달 23일 오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열린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 추도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2020.5.23 [노무현 제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2020-05-23 13:47:54/<저작권자 ⓒ 1980-202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

형사재판에서는 물적 증거와 증인 진술, 정황 증거 세가지를 종합적으로 따진다. 이 가운데 판사의 눈조차 흐리게 만드는 게 증인 진술이다. 재판을 유리하게 만들려고 각 측이 ‘입을 맞춘’ 증인을 동원하고, 증인이 진술을 갑자기 번복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헌법재판관으로 퇴임한 어떤 법조인은 “복마전이나 다름없는 법정에서 ‘오염된 진술’을 지혜롭게 도려내고 사실관계를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판사의 역량”이라고 했다.

10년이 지나 다시 이슈가 되고 있는 한명숙 정치자금 사건에서도 증인 진술이 뜨거운 쟁점이었다. 애초 금품을 건넸다는 공여자(고 한만호 한신건영 대표)가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면서 재판은 초기부터 혼돈에 빠졌다. 검찰은 진술 번복 경위를 밝히겠다며 한만호의 옥중 비망록을 압수하고, 진술번복 과정을 전해들은 구치소 동료들을 법정 증인으로 세우기도 했다. 검찰에서 허위로 진술했다는 내용의 비망록은 재판정에 제출됐지만 증거로 채택되지 못했고, 구치소 동료들은 ‘한만호가 정치자금을 제공했다고 떠들다 말을 뒤집었다”고 증언했다. “인생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며 무죄를 주장하는 한 전 총리로서는 속이 뒤집힐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검찰 입장에서 증언했던 한만호의 구치소 동료들이 최근 “검찰이 조작했다”며 말을 바꾸자 ‘약쟁이와 사기꾼’이라던 비난을 잊고 ‘정의의 대변자’라며 반색하고 나섰겠는가.

워낙 쟁점이 많은 사건이라 재판 과정을 취재하면서도 유무죄를 판단하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다만 지금도 또렷하게 인식하는 건 정치검찰의 행태다. “2007년 한 전 총리에게 9억원을 줬다”는 한만호의 진술에 따라 검찰은 2010년 4월4일 한신건영을 압수수색했다.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5만달러를 받은 혐의로 기소된 한 전 총리가 1심 무죄 판결을 받기 하루 전이었다.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서울시장 선거를 저울질하던 한 전 총리 입장에서는 청천벽력이나 다름 없었다. 한 전 총리는 0.6%포인트의 박빙 결과를 두고 “검찰 수사가 아니었으면 질 수 없는 선거”라고 항변했다. 당시 취재기자 대부분도 검찰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했다. ‘권력이 검찰을 앞세워 선거에 개입했다’는 인상은 아직도 지울 수 없다.

재판 과정은 더욱 혼미했다. 1심은 돈을 주고받았다는 한 전 총리의 아파트와 주변 도로에서 현장검증까지 실시한 끝에 무죄를 선고했다. 한만호의 검찰진술은 배제됐고, 어떤 물증과 정황도 유죄의 단서가 아니라는 게 재판부 판단이었다. 2심은 그러나 ‘모든 물증과 정황이 (한 전 총리에게 돈을 건넸다는)한만호의 검찰진술을 입증하고 있다’며 1심 재판부를 나무란 뒤 유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이 최종 유죄(9억원 가운데 3억원은 만장일치, 6억원은 대법관 5명이 무죄 의견)를 선고하며 마무리됐지만, 1심과 2심의 정반대 판단은 지금도 납득하기 어렵다.

민주당과 여권이 한 전 총리의 억울함을 풀겠다면서 재심과 재수사 카드를 들고 나왔다. 검찰이 한만호를 압박하기 위해 구치소 동료들에게 진술을 강요하고 법정 증언을 대비해 암기와 연습까지 시켰다는 등의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는 점을 감안하면 수사 과정의 인권침해 여부는 분명히 조사해야 한다. 당시 검찰 수사의 정치적 편향성 또한 따져야 한다.

하지만 재심으로 밀어붙일 사안인지는 신중하게 짚어봐야 한다.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물증과 정황증거에 여러 해석이 덧붙여지는 바람에 진실의 법정은 이미 빛이 바랬다. 대법관 전원이 유죄로 판단한 3억원에 대해서는 번복될 가능성도 높아 보이지 않는다. 당시 2심 재판부와 대법원이 정치적으로 오염됐다고 주장한다면 도리어 ‘국회의사당을 장악한 177석의 힘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리려 한다’는 역풍에 휘말릴 수 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쉬운 게 법치주의(rule of law)다.

김정곤 사회부장 jkkim@hankookilbo.com

[HL1_1092] 김정곤 사회부장. 2020.05.13. 이한호 기자 /2020-05-13(한국일보)
[HL1_1092] 김정곤 사회부장. 2020.05.13. 이한호 기자 /2020-05-1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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