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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봄날, 노변정담(爐邊情談)

입력
2020.06.06 04: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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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일보 자료사진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많다. 폭신한 흙길, 유리알처럼 맑게 흐르던 가는골의 계곡물, 거기 돌 틈에 숨어 몸집을 불리던 가재들, 말린 약쑥으로 피워 올린 한여름 밤의 모깃불 냄새, 타닥타닥 타 들어가는 모깃불 옆 평상에 누워 헤아리던 밤하늘의 별자리, 간장물에 참깨 듬뿍 뿌려 말아먹던 보리국수, 잔소리쟁이 친구, 그 친구와 둘이서 경포대 해안으로 달려가 밤새워 소주 마시며 나누던 이야기, 그리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린 단골 식당들….

인왕산 기슭에 10년 넘게 터 잡고 살며 매주 한두 번 들르던 식당이 있다. 필운동 빌라 주차장 한끝 공간을 빌려 청국장과 다슬기 해장국 등을 팔던 곳이다. 소박하다 못해 다소 누추한 밥집이라 회사를 방문한 귀한 손님들을 그곳으로 모시지는 못했다. 안 그래도 요란하게 떠오르던 그곳 서촌 골목에 온갖 트렌디한 식당들이 들어서던 시절이니, 아예 후보 축에 끼지도 못했던 것 같다. 다만 편한 친구가 놀러 왔을 때, 바쁘게 일하다 끼니를 놓쳤을 때, 집에 가서 혼자 밥해 먹기 귀찮은 저녁에는 어김없이 그곳을 찾았다.

각각 요리와 손님 응대를 책임지며 동업하는 두 여성은 오래된 친구 사이였다. 둘 중 손님 응대를 맡은 여성은 얼핏 퉁명스럽다 싶을 만큼 말수가 적었지만, 그들과 동향에서 나고 자란 나는 단번에 상대의 성정을 꿰뚫고는 친근감을 느꼈다. 그이는 단골들의 음식 취향을 기가 막히게 파악했다. “오늘은 젊은 아저씨가 같이 와서….” 회사 동료가 동행하는 날이면 그이는 접시가 넘치도록 퍼담은 어묵 조림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한 마디 툭 던지고 돌아섰다. 피로에 지친 몸으로 밥집 의자에 널브러지듯 혼자 주저앉았던 어느 저녁에는 부추와 호박, 풋고추를 썰어 넣고 뜨끈하게 부쳐낸 부침개를 내 앞에 쓱 내놓았다. “부침개를 엄청 좋아하는 거 같어서….” 웅얼거리며 돌아서는 그이를 대신해 사교성 좋은 주방 사장님이 큰소리로 거들었다. “지난번에 반찬으로 나갔던 부침개를 언니가 아주 맛있게 먹었다고, 다음에 오면 서비스로 꼭 부침개를 부쳐 주자고 친구가 나한테 신신당부를 하대요.”

한데 7년 전 내가 다른 동네로 이사한 후부터는 그 집 밥맛이 무지하게 그리운 날, 맘먹고 가야만 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거기, 충청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만 알아챌 수 있는 고향의 맛을 구현해 내는 밥집이 있다는 사실이, 서울살이 30년 넘는 내게 얼마나 든든한 언덕이었는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불쑥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선 카페를 보기 전까지는.

다슬기 해장국을 먹으러 갔다가 허탕 친 재작년 여름 이후 나는 몇 번이나 필운동에서 옥인동에 이르는 서촌 골목을 어미 잃은 강아지처럼 누볐다. 손맛이 남다른 그들이 밥집을 아예 접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어제 오후였다. 회사 앞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한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마스크를 쓰고도 우리는 단박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상대가 내 손을 덥석 잡고는 자기 가던 길로 이끌었다. “그러잖어두 친구랑 얘기 엄청 했어요, 충청도에서 올라온 그 언니가 우리 많이 찾을 거라고. 건물주가 갑자기 가게를 빼라고 하는 바람에 단골들한테 인사도 못 하고 나왔어요.” 말수 적던 그이가 쉬지 않고 내게 이야기를 했다. 거리에 선 채 10분 가까이 대화하는 동안 내가 건넨 말이라고는 “아, 그랬군요.” “막막했겠다.” “저두요.” 같은 추임새가 전부였다. 다만 두 눈을 끔벅이면서 다시는 소중한 것들을 허무하게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예상대로 그들은 무악재 인근에 식당을 다시 열었다고 했다. 나는 다음주 월요일 점심때 밥 먹으러 가겠노라 약속했고, 그제야 우리는 잡았던 손을 풀고 각자의 길로 돌아섰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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