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어보고 싶었어. 내 엄마한테, 엄마의 엄마한테,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한테. 아빠한테 물어보고 싶었어. 아빠의 아빠한테, 아빠의 아빠의 아빠의 아빠한테. 우리 언제부터 이랬는지.”
n번방 사건 이전에 또 다른 n번방들이 있었다. 위안부만 해도 엄마의 엄마의 엄마, 아빠의 아빠의 아빠로 거슬러 일본군 위안부만 있는 게 아니다. 미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도 있었다. 말하자면 아날로그 시대의 n번방들이었다.
9일 서울 동숭동 아르코예술극장에 오르는 연극 ‘공주들’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 번은 지켜볼 만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김공주. 일본군 위안부에서 한국군 위안부로, 다시 미군 위안부를 거쳐 성매매 집결지까지 흘러든다. 1970~80년대 기생 관광, 베트남전은 물론 최근 여론의 공분을 샀던 버닝썬 사건, n번방 사건까지 지난 한 세기 성과 관련된 거의 모든 사건이 다뤄진다. 크게는 나라를 위해, 작게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희생됐던 수많은 공주들은 마지막으로 묻는다. 그렇다면 성을 산 사람은 누구인가.
김수정 연출은 “2018년 미투 운동 때에서야 나 또한 예전에 그런 피해를 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작품을 구상했다”며 “이 문제의 기원을 찾다 보니 지난 100년간 구축된 ‘성매매 체제’를 살펴보게 됐다”고 말했다.
그래서 무대 자체가 꽤 수위가 높다. 극장엔 문이 3개 있는데, 김공주의 입, 성기, 항문을 상징한다. 극장 자체가 김공주의 몸이요, 이 문을 드나드는 관객, 배우는 김공주를 드나드는 이들이 된다. 김 연출은 “김공주라는 무대 위 인물이, 이미 지난 과거가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라는 걸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극은 사실적이다. 버마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한 문옥주씨, 일본군 위안부에서 미군 위안부로 살아오며 아들을 베트남에 파병 보낸 김순악씨, 미군 위안부에서 여성 운동가가 된 김연자씨, 미군 위안부 피해자 김정자씨의 증언을 토대로 삼았다. 배우 12명과 스태프는 그들의 삶을 열심히 공부한 뒤 각자 장면을 구성하고 그중 한 장면을 선택, 각색하는 방식으로 극을 함께 만들었다. 2018, 2019년 이미 두 차례 무대에 올랐으나, 당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반영하기에 내용과 구성은 늘 바뀐다.
당장 올해 공연만 해도 n번방 사건을 새로 포함시켰다. 또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와 정의기억연대 사이의 갈등도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배우와 스태프가 모여 치열하게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김 연출은 “이용수 할머니의 의견을 경청해야 하지만, 정의연의 활동도 존중받아야 한다”면서 “한 개인이 전체를 포괄하거나 대변할 수는 없는데, 모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집단화해 생각하는 오류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기에 ‘공주들’에서도 김공주를 비롯, 등장인물에 대한 개인적 연민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의성에 더해 작품성까지 인정받아 ‘공주들’은 지난해 서울연극제에서 우수상, 관객평가단 인기상, 신인연기자상(김공주 역 양정윤) 등을 받았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성매매 체제는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성매매특별법 이후 집창촌은 사라졌다지만, 다른 성매매 통로들은 여전하다. 김 연출은 “국가가 성구매자들을 강력하게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성매매를 용인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연극의 궁극적인 목표는 “더 이상 이야기가 새롭게 추가되지 않는 세상이 오는 것”이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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