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지법, “거짓말에 속아 성폭행, 범죄라는 인식 못 해” 무죄 판결
“피해자가 있는데 무죄라니” “속아서 강간했다고 하면 문제없나” 비판
랜덤 채팅 어플리케이션(앱)에서 여성 행세를 하며 ‘강간 상황극’을 유도한 남성에게 속아 엉뚱한 여성을 성폭행한 남성에게 4일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자신의 행위가 범죄라고 인지하는 미필적 고의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인데, 이를 두고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대전지법 제11형사부(부장 김용찬)는 이날 주거침입강간 교사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모(29)씨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한 반면 주거침입강간 등의 혐의로 기소된 오모(39)씨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이씨는 지난해 8월 랜덤 채팅 앱에서 자신을 ‘35세 여성’이라며 “강간당하고 싶다. 만나서 상황극 할 남성을 찾는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고, 이에 관심을 보인 오씨에게 집 주변 원룸 주소를 알려줬다. 오씨는 그가 알려준 원룸에 찾아가 그곳에 사는 여성을 성폭행했다.
이 사건은 검찰이 실제 성폭행을 저지른 남성보다 거짓말로 상황극을 꾸민 이씨에게 2배가 넘는 형 선고를 법원에 요구, 재판 결과에 관심이 쏠렸다. 검찰은 지난달 이씨와 오씨에게 각각 징역 15년과 7년을 구형했다.
이날 재판부는 이씨의 혐의는 인정하면서도 실제로 성폭행을 저지른 오씨의 경우 “이씨에게 속아 강간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여 실제 강간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등의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했다. ‘이씨에게 속아 도구로 이용당한 것’이라는 오씨와 변호인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실제 피해가 발생했는데도 무죄라는 결과를 두고 온라인에서는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한 누리꾼은 관련 기사를 두고 “몰랐다 하더라도 저항의 의사를 분명히 밝힌 여성을 상대로 성폭행을 저질렀는데 죄가 없다고 할 수 있나”라고 꼬집었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 역시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강간 실행범은 피해 여성이 보였을 극도의 공포감에 대한 일체의 공감이나 의구심 없이 오직 자신의 성욕만을 해소하고자 여성을 도구화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악용의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한 누리꾼은 “앞으로 ‘속아서 성폭행 했다’고 우기면 처벌을 받지 않는 선례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한편 재판부는 오씨에게 “민사적으로는 불법행위로 인한 책임을 져야 한다”며 “무죄를 선고 받은 것이 본인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며 평생 피해자에게 죄책감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검찰은 “사안의 성격이나 피해의 중대성에 비춰 볼 때 법원 판단의 타당성에 의문이 있다”며 항소 의사를 밝혔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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