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일당의 범행에 가담해 돈을 인출하는 역할을 했음에도 자신의 행위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법은 그를 처벌 할 수 있을까.
치매를 앓고 있는 A씨는 지난해 대출을 받기 위해 여러 군데에 상담을 시도했으나 진전이 없던 중 보이스피싱 조직원인 누군가에게서 갑자기 “대출을 해주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돈이 필요했던 A씨는 상대가 누구고, 어떤 사람인지를 의심할 틈도 없이 곧장 200만원 대출을 신청했다. 그러자 상대는 A씨에게 계좌번호를 알려달라 했고, 뒤이어 ‘당신 계좌로 돈을 송금했으니 인출해서 지시하는 사람에게 전달해주면 대출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제안을 받아들인 A씨는 자신의 계좌로 송금된 보이스피싱 피해금액 590만원을 인출하기 위해 상대가 지시한 서울 강남구의 한 은행 지점으로 향했다. 다행히 은행직원이 이를 보이스피싱 피해금으로 의심하고 지급을 거절해 A씨의 범죄는 미수에 그쳤다.
1심은 A씨의 행위를 전부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고, A씨 측은 곧장 항소했다. “A씨가 뇌경색으로 인한 경도 인지장애 내지 치매 증세를 갖고 있어 자신의 행위가 보이스피싱 범행에 가담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범행의 고의가 없었다”는 취지다.
실제 A씨는 2018년에도 성명불상자의 전화를 받고 자신의 계좌로 입금된 3,600만원을 인출해 보이스피싱 조직원에게 전달했다가 사기방조죄로 입건됐는데, 당시 자신의 범행은 물론 조사를 받으며 수사관과 나눈 대화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이에 병원에서 검사를 시행한 결과 종전보다 인지장애 증상이 악화됐다는 진단을 받았고, 검찰은 범행에 대한 인식과 의사가 없었다고 인정해 무혐의 처분했다.
A씨는 이번 범행 직후 실시한 검사에서도 당시와 같은 판정을 받았다. 범행에 대해서도 자신이 성명불상자와 전화를 한 뒤 돈을 인출해 누군가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사실 자체는 알았지만, 그 구체적인 과정은 기억하지 못했다.
이에 이 사건 항소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9부(부장 최한돈)는 사기방조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고 4일 밝혔다.
2심 재판부는 “정상적인 인지능력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대출빙자 보이스피싱에 속아 본의 아니게 인출책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A씨의 나이와 정신건강 상태에 비춰볼 때 그가 자신의 행동이 보이스피싱 범죄 행위의 일종에 해당한다는 점을 의심하지 못한 것이 성명불상자의 범행에 가담하거나 이를 용이하게 하려는 고의에 해당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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