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난민은 ‘비(非)국민’이다. 국가 밖에 사는 사람들이다. 정박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경우가 많다. 국적 없는 삶은 불안하다. 불안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거부되기 일쑤다.
난민은 ‘있다’. 다만 그들은 늘 ‘없는 듯’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저자 중 한 명인 신지영은 고백한다. “‘우리’가 난민 캠프에서 ‘그들’이 겪을 고통을 상상하는 건 한계가 있다.” 2020년 5월 15일 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 로힝야 난민 캠프에서 코로나19 확진자 2명이 발생했다는 보도에 안타까워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반문한다. “이곳의 코로나도 힘든데 ‘왜’ 그들의 고통까지 알아야 하는가.”
그들이 육박해 온 적이 있다. 2018년 6월 제주도에 예멘 난민 500여명이 도착했다. 한국 사회가 처음 맞이한 ‘집단 난민’의 경험이었다. 프로젝트 그룹 ‘난민×현장’은 이들에 대한 혐오가 퍼지던 그해 10월 결성됐다. ‘난민, 난민화되는 삶’의 저자 13명은 이 그룹의 멤버들이다.
그러나 기어코 깨닫고야 만 것은 ‘무국적자인 난민’ 그리고 ‘국적을 가진 그룹 멤버’ 사이의 간극이었다. “‘이곳’의 활동은 ‘저곳’ 난민의 삶을 바꾸기에는 너무 무력했다.” 포기하진 않았다. ‘접점’을 모색했다. 만만치 않았다. 각자 ‘몸’ 놓인 자리가 엄연히 달랐고 ‘난민다움’ ‘여성다움’ 따위의 추상적인 정체성으로 구체적 실존을 윽박지르거나, 소수자들 간 피해의 무게를 재기 일쑤였다. 때론 대립을 부추기는 포퓰리즘에 빌미를 줄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다.
난민은 ‘된다’. ‘누가’ 난민인지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난민이 되는지다. 책은 역사 속 난민을 소환한다. 민족국가라는 경계 밖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다. 요즘 논란이 된 일본군 위안부도 그들이다.
오키나와의 배봉기, 태국의 노수복, 베트남의 배옥수. 저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한 가지 사실은 같다. “이들의 귀향은 달성되지 못했다.” 1991년 김학순의 증언 이전, 80년대 중반 무렵 그들의 증언은 “순결 이데올로기에 영합한 서사로 재생산됐다”. ‘몸을 망친’ 그들의 현재를 ‘과거를 깊숙이 묻은 채’ ‘뒷골목에서 죄인처럼’ ‘숨죽여’ 사는 삶으로 당시 대중매체들은 묘사했다. 이런 재현은 “국민국가 바깥에서 등장한 조선인 위안부를 민족 수난사의 증인으로 내세우면서도 그들의 삶의 자리를 민족국가 바깥으로 배제하도록 작동했다”.
‘난민×현장’은 관점을 옮겼다. ‘피해자와 동일시’보다 ‘스스로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인식’ 쪽에 무게를 더 실었다. 일종의 각성이다. “고통의 무게가 아니라 우리를 ‘난민의 삶’으로 이끄는 억압과 차별의 힘을 파악하는 게 중요한 일 아닌가.” 그래서 착목한 연대 지점이 ‘반(反)군사주의’다. 국민과 비국민의 경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거기’와 ‘여기’를 연결하는 ‘우리’를 상상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보여주는 3부는 저자들의 성장기다.
난민, 난민화되는 삶
김기남 등 13명 지음
갈무리 발행ㆍ472쪽ㆍ2만4,000원
그래서 이 책의 미덕은 한계의 인정이다. 아무리 애써도 난민 아닌 자가 난민이 될 수는 없다. ‘난민을 만드는 조건’에 대한 천착이 알려 준 방법이다. 한편으론 다행이기도 하다. ‘어쩌면’이란 희망의 단초를 봤기 때문이다. 궁극적 질문은 ‘왜’ 저 먼 곳의 고통까지 신경 써야 하는가다. 글쎄. 하지만 ‘그래도’라는 속삭임을 외면하기 힘들다. 그게 인간이어서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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