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가 유럽연합(EU)과 영국ㆍ인도 등이 도입했거나 도입을 검토 중인 ‘디지털세’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미국이 이를 근거로 자국 기업들의 부당한 피해를 복원하라는 주장을 넘어 보복관세 카드까지 꺼내 들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온다. 이 경우 미국의 무역전쟁 전선이 유럽ㆍ아시아 동맹국들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2일(현지시간) 무역법 301조를 근거로 EU 차원의 디지털세 도입 방안을 포함해 영국 인도 브라질 이탈리아 스페인 터키 인도네시아 체코 오스트리아 등 9개국의 디지털세 정책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 기업과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디지털세는 구글ㆍ페이스북 등 국경을 초월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대 정보기술(IT) 기업에 물리는 세금이다. 트럼프 정부는 그간 디지털세가 사실상 미국 기업들을 ‘부당하게’ 겨냥한다고 주장해왔다. 미국은 지난해에만 해도 프랑스가 디지털세를 도입하자 24억달러(약 3조원) 상당의 프랑스 제품에 보복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예고하면서 양국은 무역전쟁 문턱까지 갔었다. 그러다 올해 1월 디지털세 시행과 관세 부과를 상호 유예키로 하면서 갈등은 일단 봉합된 상태다.
하지만 미국이 이번에 무역법 301조를 다시 꺼내 들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디지털세 전쟁’이 확전 양상으로 전개될 조짐이다. 뉴욕타임스(NYT)는 특히 트럼프 정부가 현재 양자 무역협상을 진행 중인 영국ㆍ인도ㆍ브라질을 조사 대상에 포함시킨 점에 주목하며 “(디지털세 조사를) 협상 과정에서 지렛대로 삼으려는 시도”라고 분석했다. 1974년에 도입된 301조는 미 행정부가 무역 상대방의 불공정행위에 보복할 권한을 명시한 법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중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이를 활용한 바 있다.
그러나 당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미국 경제가 깊은 불황에 빠진데다 인종차별 항의 시위로 미 사회가 혼돈에 빠진 상황에서 무역전쟁 확대나 다름없는 이번 조치에 대한 비판이 크다. 에드워드 알덴 미 웨스턴워싱턴대 교수는 워싱턴포스트(WP)에 “중국과의 무역 문제가 겨우 풀리려는 이 시점에 동맹국들과 왜 또 무역 의제를 두고 싸움을 벌이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NYT도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위협을 수시로 이용해 다른 나라들을 (무역)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 바 있다”면서 “하지만 심각한 경기침체 상황에서 기업들이 여러 전선에서의 동시다발적인 무역전쟁의 고통을 견딜 준비가 돼있을지 미지수”라고 꼬집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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