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이 미국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방문군 협정’(VFA) 파기 결정을 전격 보류했다. 필리핀 외교부는 “역내 정치 및 다른 발전 상황을 고려했다”고 밝혔지만, 현지에선 최근 심화되고 있는 미중 갈등 상황에서 미국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가면서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상대이기도 한 중국을 견제하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테오도로 록신 필리핀 외무부 장관은 지난 2일 주필리핀 미국대사관에 “VFA 종료 절차를 최소 6개월간 중단하겠다”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보냈다고 일간 필리핀 스타 등 현지매체들이 3일 보도했다. 해당 문서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미국은 즉각 필리핀의 의견을 수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양국 간 전격적인 합의에 따라 오는 8월 종료 예정이던 VFA의 효력은 일단 연말까지 지속될 예정이다.
필리핀의 VFA 파기 보류는 중국의 최근 행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게 중론이다.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으로 중국과 긴장 관계에 놓인 필리핀이 최근 중국의 강력한 군사행동이 연이어 예견되자 VFA를 고리로 미국의 군사 영향권에 더 머물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1998년 체결된 VFA는 미군이 필리핀에 입국해 군사훈련을 할 수 있는 근거 조항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실제로 양국의 연례 합동군사훈련인 ‘발리카탄’도 VFA가 있어 가능하다.
현지에선 미국에 대한 분노로 VFA 종료 카드를 꺼내 든 두테르테 대통령의 변심에도 주목하고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난 2월 자신이 주도하던 ‘마약과의 전쟁’을 지휘한 전 경찰청장이 미국으로부터 비자 발급을 거부당한 데 반발해 일방적으로 VFA 종료를 통보했었다. 당시 그는 “미국이 필리핀의 내정을 간섭하고 있다”며 불 같이 화를 낸 것으로도 알려졌다.
동남아 외교가 관계자는 “자존심 강한 두테르테 대통령이 결정을 번복할 정도로 최근 중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라며 “중국과 인접한 다른 동남아 국가들 역시 필리핀과 비슷한 고민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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