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염병으로 도로 곳곳이 불타고 돌멩이와 시위대 깃발이 길바닥에 어질러져 있는 대학가 앞. 피아노를 전공한 여주인공 윤지수(이보영 분)는 빠른 손으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7번 3악장을 연주한다. 심각한 표정의 남자 주인공 한재현(유지태 분)은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그랜드피아노 쪽으로 걸어간다. 화음으로 한 번에 칠 것을 여러 음으로 나눠 치는 분산화음 덕에 몹시 화려하면서도 음울한 선율, 이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치명적 일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대학시절 첫 사랑과의 재회를 다룬 tvN 드라마 ‘화양연화’의 시작 장면이다. ‘템페스트’라는 제목으로도 널리 알려진 베토벤 소나타 17번은 드라마의 전체 흐름, 방향을 일러준다. 상징성이 큰 만큼 이 곡을 고른 건 음악감독이 아닌 작가다. 전희영 작가는 “폭풍 같은 알레그레토의 곡은 두 주인공이 겪는 가슴 아픈 사랑의 질곡을 재현하는 표상”이라며 “폐허가 된 거리에 놓인 피아노는 잔혹한 시절을 견디고 남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드라마는 1990년대 중반 학생운동을 하며 만난 대학생 윤지수와 한재현의 풋풋한 첫사랑을 다룬다. 그러나 여느 첫사랑이 그렇듯 둘의 사랑은 예기치 못한 비극에 좌초되고, 두 사람은 십 수년 뒤 우연히 다시 만난다. 이번 만남은 그러나 악연이었다. 윤지수를 해고한 대형마트의 부사장이 한재현이었던 것. 첫사랑, 그리고 첫사랑만으로 끝나지 않은 비극을 ‘템페스트’가 암시하는 셈이다.
‘템페스트’ 자체도 그렇다. 이 곡은 1802년, 그러니까 베토벤이 청력 상실 문제로 가장 고통스러워할 당시 쓰여졌다. 선율 자체에서 격정적 비극이 배어 나오는 이유다.
‘템페스트’란 제목은 베토벤 사후, 후대 음악인들이 붙였다. “소나타 17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베토벤 본인이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읽어보라”고 답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 격정적 비극의 드라마는 어떤 결론으로 치달을까. 그에 대한 암시 또한 ‘템페스트’에 녹아 있다. 허명현 클래식 평론가는 “베토벤 작품 중에선 드물게 ‘템페스트’는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다음의 조용한 날씨처럼 곡이 끝난다”고 말했다. 다시 만난 한재현과 윤지수의 사랑이, 한 바탕 격정을 지나 잠잠해지는 때가 올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템페스트’는 드라마 ‘화양연화’에 앞서 2010년 개봉작 영화 ‘하녀’에도 쓰였다. 하녀 은이(전도연)가 새로 일하게 될 집을 찾아갔을 때, 집 주인 훈(이정재)이 연주하는 곡이 바로 이 ‘템페스트’다. 격정적 사랑의 비극을 암시하는 테마로 쓰인 셈이다.
드라마 ‘화양연화’에 자주 등장하는 곡 중 하나는 캐나다 출신 피아니스트 앙드레 가뇽이 쓴 ‘첫날처럼(Comme au premier jour)’이다. 누가 들어도 아련하고 감미로운 느낌이 드는 게, 딱 첫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템페스트’와 대조되게, 이 곡이야 말로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한 시절, 즉 ‘화양연화’ 그 자체를 상징하는 곡이다. 한재현이 윤지수에 반한 첫날을 의미한다. 전 작가는 “이 곡을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마들렌처럼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첫사랑의 추억은 시공을 초월해 그렇게나 강렬하다.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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