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운동이 성역이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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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운동이 성역이 될 때

입력
2020.05.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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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엔 투명한 공개와 신속한 대응이 중요

윤미향 사태, 위안부 운동 방식 문제 제기

상식적 지적마저 진영 논리 대응은 독선

[저작권 한국일보]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의원이 29일 오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의기억연대 활동 당시 회계 부정 등 각종 의혹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 앞서 인사하고 있다. 오대근기자

1982년 미국 시카고에서 7명의 시민이 갑자기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 모두 진통제 타이레놀을 복용한 것으로 드러나자 미국은 공포에 빠졌고 타이레놀 판매량은 곤두박질쳤다. FBI는 누군가 소매 과정에서 타이레놀에 청산가리를 넣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제품 하자가 아니었으니 엄밀히 말해 제조사 책임은 없었다. 하지만 존슨앤드존스는 곧바로 재고 물량을 폐기하고 시중에 풀려 있던 3,100만병의 타이레놀을 수거해 전수 검사를 했다. 회사 CEO는 TV광고에 나와 “지금 바로 타이레놀 복용을 중단하라”고 위험성을 알렸다. 피해자 가족에겐 사과 편지를 보냈다. 사건 이후 이물질을 주입하기 어렵게 3중 캡슐도 도입했다. 그러자 존폐 위기에 있던 회사는 몇 달 만에 거짓말처럼 정상화됐다. 타이레놀은 오히려 판매량이 늘었고 회사 이미지는 더 좋아졌다.

타이레놀 사건은 위기 관리의 모범으로 자주 거론되는 사례다. 모두가 존슨앤드존스처럼 완벽하게 대처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문제가 발생하면 ‘투명한 공개와 신속한 대응→진지한 사과→재발 방지책 마련’의 수순을 밟는다. 반대로 벌어진 상황을 은폐ㆍ축소하거나 변명으로 일관하면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 일쑤다.

지난 7일 정의기억연대 기부금 사용이 투명하지 않다며 이 단체 이사장 출신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정면 비판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충격적 기자회견 이후 20여일이 지났다. 하지만 정의연 사태는 정상적인 위기 관리 방향과 거꾸로 흘러왔다.

이 할머니의 1ㆍ2차 기자회견을 통해 압축된 정의연 관련 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운동 방식이다. “난 30년 재주 넘고 돈은 그들이 받아먹었다”는 절규는 피해자 의견을 존중해 위안부 운동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정의연이 할머니들의 생활 안정을 돕는 지원단체로 역할이 한정된 건 아니지만, 피해자들이 이토록 운동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불만을 키워 왔다면 심각한 문제다. 둘째, 불투명한 운영이다. 정의연이 시민ㆍ기업들이 낸 기부금을 허술하게 관리하고 공시에 누락한 사례가 잇따라 확인됐다. 그 돈이 윤 의원 개인 주머니로 들었는지는 검찰이 수사 중이니 예단해선 안 된다. 하지만 기업에서 받은 기부금 10억원으로 진행한 안성 쉼터 고가 매입 및 헐값 매각 의혹은 그 돈들이 허술하게 사용됐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자초한 게 사실이다.

정의연의 주장처럼 작은 시민단체라 회계 관리에 소홀함이 있을 수 있고, 횡령ㆍ착복 의혹 가운데 아직 사실로 확인된 것은 없다. 하지만 위안부 운동이 검증의 성역일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 시민 운동이라고 해서 위기 대응의 원칙이 다른 것도 아니다. 그간의 운동 방식과 조직 운영에 문제점이 드러났으면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한 뒤 오해가 있으면 풀고, 사과할 건 사과하는 게 제대로 된 대응이다.

하지만 윤 의원과 정의연은 상식적인 문제 제기를 마치 무슨 의도가 있는 것처럼 대했다. “위안부를 향해 만원 한 장 낸 적이 없는 당신이 감히 어떻게”라는 인식이었다. 그러면서 의혹에 대해 투명하게 공개하고 신속히 대응하는 대신 “독립군 회계 장부에 문제가 있다고 일본 군대 편을 들면 되겠냐”는 진영의 엄호에 숨었다. 같은 진영 매체에만 도움을 청했고 할머니를 찾아가 안아달라고 하고 이걸 용서로 포장했다가 역효과만 낳았다. 잠행 11일 만에 연 공개 기자회견도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최악의 위기 대응은 문제를 제기한 사람마저 비난하는 태도다. 이번엔 진보 진영에서조차 할머니의 기억 왜곡 또는 윤 의원만 정치권에 진출한 데 대한 분노라는 식의 곡해가 나왔다. 한술 더 떠 집권 여당 대표는 “굴복해선 안 된다”고 아예 전쟁을 선포했다. 자신들만 옳다는 독선 아니면 보일 수 없는 태도다. 선의와 헌신으로 뭉친 운동도 과오나 실수는 있기 마련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는 정공법으로 가야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킬 수 있다. 반대로 독선적 자기 확신에 빠져 문제에 눈을 감고 근원적 대책 마련에 손을 놓으면 위기는 언제든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김영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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