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신반의? 엠넷이 그런 걸(경쟁) 안 할 리가 없는데 안 한다고 하니까 한 번 믿어볼까?” -슬릭
‘굿걸’이 여성 아티스트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진화를 알렸다. 매 회 몸집을 불리고 있는 ‘굿걸’의 묵직한 존재감이 최근 가요 시장에 불어 닥친 거센 여풍(女風)과 역대급 시너지를 빚어내고 있다.
지난 14일 첫 방송을 시작한 엠넷 ‘굿걸’은 국내 최고의 여성 힙합 R&B 뮤지션들이 방송국을 털기 위해 한 팀을 이뤄 펼치는 힙합 리얼리티 뮤직쇼다.
언더그라운드 래퍼부터 현역 아이돌까지 다채로운 라인업을 예고하며 기대를 모았던 ‘굿걸’은 소녀시대 효연 치타 에일리 제이미 슬릭 CLC 장예은 윤훼이 카드(KARD) 전지우 퀸 와사비 이영지가 최종 출연진으로 합류했다.
‘굿걸’의 론칭 소식이 전해진 이후 자연스럽게 소환된 것은 ‘언프리티 랩스타’였다. 앞서 엠넷에서 선보였던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언프리티 랩스타’는 당시 굵직한 여성 래퍼들의 출연 속 매 시즌 화제를 모았었다. 이영지 치타 퀸와사비 슬릭 등 여성 래퍼들이 ‘굿걸’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가운데,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제 2의 언프리티 랩스타’의 탄생을 전망했다.
하지만 뚜껑을 연 ‘굿걸’은 ‘언프리티 랩스타’와는 확연히 달랐다. 오히려 ‘언프리티 랩스타’와 확연히 궤를 달리 하고 있다는 점이 프로그램을 향한 호평의 근간이 됐다.
출연진들의 실력과 무대에서의 경쟁보다는 ‘여성 출연자’ 간의 기 싸움이나 친목에 더욱 조명했던 구시대식 편집은 자취를 감췄다. 개인 간의 경쟁을 통한 서바이벌이 아닌 ‘방송국을 턴다’는 콘셉트 속 제 3자와의 경쟁 구도를 형성한 덕분이었다. 10명의 뮤지션들은 ‘한 팀’이라는 결속력을 바탕으로 ‘역대급’ 컬래버 무대를 완성했다. 자연스럽게 각 출연자들이 가진 음악적 역량과 열정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선순환이 일어났다.
10명의 출연자들이 각기 다른 포지션, 각기 다른 성향을 갖고 있는 신선한 조합 역시 ‘굿걸’의 강점이 됐다. 랩을 주 종목으로 하는 이영지 치타 퀸와사비 CLC 장예은 슬릭을 비롯해 보컬로서 뛰어난 역량이 돋보이는 에일리와 박지민, ‘올라운더’의 면모로 시선을 사로잡은 소녀시대 효연 카드(KARD) 전지우 윤훼이까지. 이 같은 멤버 구성은 풍성한 음악적 시너지로 이어졌다. 지난 28일 방송에서 공개된 베스트 유닛 결정전에서 탄생한 다채로운 콘셉트의 무대는 이를 증명했다.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라는 소개와 함께 등장한 래퍼 슬릭이 그리고 있는 서사 역시 주목할 만하다. 페미니스트 여성 래퍼로서 묵직한 메시지를 담은 무대와, 성 소수자들을 위한 행보로 강렬한 인상을 남겨왔던 슬릭은 ‘굿걸’ 출연 소식만으로도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일각에서는 페미니즘 선언을 한 슬릭의 출연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목소리가 전해지기도 했지만 3회 방송을 마친 지금, 슬릭의 출연이야말로 ‘굿걸’이 기존의 여성 뮤지션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을 넘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던 ‘한 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첫 방송 크루 탐색전 이후 진행된 유닛 선호도 조사에서 가장 적은 득표수를 기록한 슬릭과, 그와의 유닛 무대에 대한 부담감을 표하는 9명의 출연자들의 모습은 대중이 그를 바라보는 모습과 닮아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 짧게 자른 헤어스타일, 맨발로 무대에 올라 성 소수자들과의 연대를 노래했던 슬릭이 페미니즘을 선언하지 않은(혹은 여성 판타지를 자극하며 음악 시장에서 인기를 얻어 온) 다른 출연자들과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결국 유닛 선정 당시 ‘깍두기’ 신세가 되며 마지막까지 팀을 정하지 못한 효연과 한 팀이 된 그는 베스트 유닛 결정전에서 자신을 향한 편견을 스스로 깼다. 효연과의 컬래버 무대를 통해 댄스는 물론 메이크업까지 도전한 것이다. ‘페미니스트 래퍼’라는 이미지 속에 갇혀있던 자신의 이미지를 깬 슬릭은 적극적이고 성실한 태도로 무대를 준비했고, 결국 베스트 유닛의 자리까지 꿰찼다. 그를 향한 아홉 멤버의 생각 역시 이전과는 달라졌다.
엠넷이 슬릭이라는 존재를 통해 그린 성역 없는 뮤지션들의 화합은 그간 여성 뮤지션들이 주축이 됐던 프로그램에 따라붙던 비판의 꼬리표를 잘랐다. 나아가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포용할 수 있는 스펙트럼 역시 확장됐다.
최근 여성 아티스트들이 가요계에서 굵직한 활약을 펼치며 두각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기존 문법을 깨는 ‘굿걸’의 존재감은 더욱 빛나고 있다. 탄탄한 실력과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까지 모두 갖춘 10명의 뮤지션들이 향후 본격적으로 선보일 역대급 무대들이 음원 시장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기대가 커진다.
홍혜민 기자 hh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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