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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재난지원금이 바꾼 작은 일상

입력
2020.05.30 04:3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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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로 북적이는 서울 망원시장. 연합뉴스
시민들로 북적이는 서울 망원시장. 연합뉴스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은 주말, 가족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특별히 무언가를 한 건 아니다. 평소에도 가던 슈퍼에 가서 장을 봤다. 대신, 지원금을 받지 않았더라면 사지 않았을 물건을 망설이지 않고 골랐다. 냉동해뒀다가 전자레인지에 데우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훈제 연어라든가, 예쁜 병에 담긴 체리잼 같은 것들이었다. 장을 다 본 후에는 슈퍼에서 멀지 않은 중국 음식점으로 가서 짬뽕과 깐풍기를 먹었고, 입가심용으로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사 먹었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동네를 천천히 걸으며 담장 너머로 흐드러진 장미꽃을 구경했다. 몇 십 만원이 더 생겼을 뿐인데 일상이 훨씬 더 여유롭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주변 사람들이나 SNS를 통해 다른 이들은 긴급재난지원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도 본다. 평소보다 조금 더 좋은 음식으로 식사를 하거나, 갖고 싶었지만 비싸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물건을 사는 경우도 있다. 긴급재난지원금으로 소고기를 사 먹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지만, 나는 사람들이 이 돈을 어디에 쓸지 고민하는 걸 보는 게 아주 좋다. 고민 끝에 원래 누리던 것들보다 조금 더 나은 무언가를 선택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다.

“기본소득은 전체로서의 나를 추정하고 전제하면서 나라는 인간의 존재를 안정시킨다. (중략) 혼자서 죽도록 일하고 쥐꼬리만 한 사유재산에 전전긍긍하는 인간이 아니라 공공의 영역 속에 공존한다는 존재감, 나에게 기본소득의 상상력은 그런 것이다.” 서영인 평론가의 책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에서 이 부분을 읽은 후 기본소득청‘소’년 네트워크에 가입한 적이 있다. ‘어떻게 가능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한국에도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좋겠다’라는 막연한 바람으로 한 일이었다.

긴급재난지원금을 받고 써 보면서, 나는 기본소득에 관해 더욱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됐다. 기본소득이란 모든 국민에게 보편적, 개별적, 정기적으로 지급하고, 그 대가로 무언가를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 돈이다. 긴급재난지원금은 한시적으로 지급되는 돈이기에 기본소득과는 다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에게 이 정도의 돈이, 혹은 이것보다 더 많은 금액이 심지어 정기적으로 생긴다면 어떤 일상을 보내게 될지 상상해 본다. 아마 지금 하는 일 중 몇 가지를 줄이고 남은 시간에는 가족 또는 친구들과 함께 혹은 혼자 산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더 많이 먹고, 책을 더 많이 읽지 않을까. 하고 싶지 않은 일 앞에서 받을 돈을 셈해 보기보다는 조금 더 과감하게 거절하는 용기를 갖게 되지 않을까.

코로나19의 시대를 지나며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의 관점도 바뀌어야 함을, 세상의 거의 모든 면에서 전환이 일어나야 함을 깨닫는다. 그런데 최근, 가장 바뀌어야 할 것 중 하나인 노동 환경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얼마 전 쿠팡 부천 물류센터에서 일하던 사람 중 다수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첫 확진자 발생 소식을 처음 알게 된 회사 측은 이 사실을 직원들에게 알리지 않고 업무를 강행했으며, 그 때문에 직원 수백 명이 정상 출근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물류량은 많고, 일하다 보면 땀이 줄줄 흘러 마스크를 착용하기 어렵고, 업무 시간은 빡빡하며, 충분한 휴식도 보장되지 않는 노동 환경에서 벌어진 일이다. 노동자의 안위보다 일의 최대 효율을 중시하는 변하지 않은 관행이 낳은 집단 감염이기도 하다.

나는 코로나19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종종 슬퍼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세상은 과연 좋은 세상이었을까?’ 묻게 된다.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누구나 안전과 건강을 보장받으며 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모든 확진자의 쾌유를 함께 빈다.

황효진 콘텐츠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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