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페미니즘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됐지만, 이론과 실천 모두 여전히 어렵습니다. ‘바로 본다, 젠더’는 페미니즘 시대를 헤쳐나갈 길잡이가 돼줄 책들을 소개합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4>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집안의 노동자’
실업이 문제다. 혹자는 세계금융위기에 비견하고 혹자는 대공황만큼이나 심각하다고 한다. 정부에서도 “한국판 뉴딜”을 선언했다.
뉴딜은 F. 루즈벨트 행정부가 대공황으로 무너진 미국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실행한 제반 정책이었다. 일반적으로 국가주도의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알려져 있지만, 핵심은 사실 ‘노동권 강화’와 ‘복지국가 건설’이었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의 ‘집안의 노동자 – 뉴딜이 기획한 가족과 여성’은 노동과 젠더의 관점에서 뉴딜을 분석하면서 이 문제를 다룬다.
그에 따르면 1930년대에 펼쳐진 노동자-실업자 투쟁은 1938년 최저임금 인상과 주당 최대노동시간 제한을 규정하는 ‘공정노동기준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뉴딜의 목표가 그저 자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재구성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 성공의 배경에는 자율조직을 만들고 적극적으로 생존을 모색했던 노동자들의 역능이 있었다.
한편 뉴딜의 복지 및 노동규정은 1914년부터 시행된 ‘자동차 왕 포드’의 ‘일당 5달러’ 임금 모델을 바탕으로 했다. 당시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고임금제였고, 덕분에 미국의 중산층이 형성되었다고 평가받지만, 이 이면에는 노동자의 사생활 규제가 놓여 있었다. 노동자가 ‘불량한 무리’와 어울리거나, 이혼을 하거나, 술ㆍ도박 등을 자주 하면 임금이 취소되거나 보류되었다.
더군다나 여성은 고임금의 자격 조건에서 애초에 배제됐다. 포드는 ‘여자들은 결혼해서 주부로서 남편의 임금을 관리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돈 버는 남편과 가사를 담당하는 주부’라는 가족 모델을 구상하고, 남성의 임금에 여성의 재생산 노동에 대한 임금을 포함시켜 버린 것이다.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의 탄생이다. 1920년대에 걸쳐 이와 같은 근대적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는다.
그리고 1929년, 대공황이 터졌다. ‘주부’로만 상상되었던 여성들은 더 혹독한 해고와 열악한 삶의 조건으로 내몰렸다. 전환의 시기(뉴딜)가 시작되자, 국가는 대공황기에 붕괴된 가족을 재건하는 데 몰두한다. 뉴딜 식 복지국가 건설에 있어 가족이 그 근간이 된 것이다. ‘집안의 노동자’들이야말로 뉴딜의 성패를 좌우하는 주체였다.
물론 이 과정이 매끈하지만은 않았다. 여성들은 여전히 집 안팎에서 쉬지 않고 ‘근무 중’이었으며, 다양한 형태로 국가와 자본에 저항했다. 전업주부들은 남편의 연좌투쟁을 지원했고, 임금노동자들은 파업을 주도했다. 일리노이주 블루밍턴의 주부들은 돈을 벌어오지 않는 남편을 대상으로 가사노동 파업을 선언하기도 했다. 놀랍게도 다른 한쪽에선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는 요구 역시 등장한다. 자신들의 일상이 자본의 총체인 국가를 유지하는 핵심 노동임을 간파한 것이다.
뉴딜은 포드주의적 합리화를 국가 운영체제로 확장시킨 계기였고, 그 기저에는 이처럼 성별화된 사회 구조조정이 놓여 있었다. 이 과정에서 ‘집안일’은 여성의 본능이자 사랑으로 포장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가사노동은 충분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K-뉴딜은 어떨까.
집안의 노동자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지음ㆍ김현지 이영주 옮김
갈무리 발행ㆍ304쪽ㆍ1만7,000원
이미 진행 중이던 규제완화에 ‘뉴딜’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에 그쳐서야 신자유주의로 무너진 삶의 토대를 더 잘게 부수는 일밖에 되지 않을 터다. 무엇보다 뉴딜 식 가족 모델은 이미 불가능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이중, 삼중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성공적인 K-방역의 그림자 속에는 매일같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여성들의 돌봄과 육아노동이 놓여있다.
그렇다면 아예 지금의 경제체제를 뒤엎고 가족을 재구성하는 실험을 해보는 건 어떤가. 예컨대 재난기본소득처럼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그렇게 ‘집안일’을 가시화하고 이에 덧씌워진 성 역할 고정관념을 덜어낼 수만 있어도, 조금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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