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지난해 러시아와의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한 데 이어 항공자유화조약(OST)에서도 발을 빼겠다고 선언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이란 핵합의(JCPOAㆍ포괄적 공동행동계획)와 INF에 이은 세 번째 군축 관련 국제조약 이탈이자,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ㆍ뉴 스타트) 연장과 관련한 불확실성을 키우는 전조로 읽힌다. 억제돼 온 글로벌 군비 경쟁 재점화와 이에 따른 군사적 긴장 고조 우려가 현실화하는 모양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21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러시아가 항공자유화조약을 위반하고 있다”며 “내일 이 조약 탈퇴 결정 통지서를 회원국에 전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항공자유화조약은 회원국 간 상호 자유로운 비무장 공중정찰을 허용하는 내용으로,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해 영국ㆍ독일ㆍ프랑스 등 총 34개국이 가입해 있다. 정식 탈퇴는 통보 후 6개월 후가 된다.
폼페이오 장관은 “러시아가 입하지야, 남오세티야 인근의 비행을 제한했다”며 “러시아의 선택적 조약 이행은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긴장과 불신을 야기한다”고 부연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날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러시아는 조약을 지키지 않았고 러시아가 조약을 준수하기 전까지 미국은 손을 뗄 것”이라고 이를 확인했다. 뉴욕타임스(NYT) 등 미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뉴저지주 베드민스터의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 상공에서 정찰한 러시아 비행기에 분노한 사실에도 주목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가을 행정부 관리들에게 미국의 조약 참여에 따른 비용과 편익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폼페이오 장관이 “러시아가 완전한 조약 준수로 돌아온다면 미국은 탈퇴를 재고할 수 있다”고 밝히는 등 트럼프 행정부는 러시아와의 협상 여지를 남겨 뒀지만 러시아와의 후속 협상 가능성은 낮다는 평가다. 알렉스 벨 미 군축ㆍ핵확산방지연구소 선임 정책실장은 “트럼프 행정부는 조약 준수 문제를 고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며 “그들은 파기하는 방법만 안다”고 꼬집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 같은 결정으로 내년 2월 만료되는 미국과 러시아의 핵무기 감축 협정인 뉴스타트 연장 문제에도 관심이 쏠린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러시아 대통령이 2010년 맺은 뉴스타트는 양국이 전략 핵탄두 수를 각각 1,550기 수준까지 줄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연장 거부 의향을 시사해 온 트럼프 행정부는 러시아뿐 아니라 중국까지 포함한 새로운 협정으로 뉴스타트를 대체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이날 보도했다. 하지만 “미중 갈등이 고조되는 시기에 중국이 소규모일지라도 핵무기 감축에 동의할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힘들다”고 NYT는 내다봤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협정이 연장되지 않으면 양대 핵 강대국은 1972년 이후 처음으로 법적 구속력이나 검증 가능한 제약을 받지 않는 시대로 돌아가게 된다”고 지적했다.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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