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고강도 제재로 동병상련 처지인 이란과 베네수엘라가 석유 거래를 계기로 부쩍 밀착하고 있다. 극심한 석유난을 겪는 베네수엘라를 위해 이란이 유조선 다섯 척을 보내자 미국은 베네수엘라 연안에 전함을 대거 배치한 데 이어 추가 제재도 저울질하고 있다. 양국의 반미(反美) 전선 구축은 물론 중남미 진출을 노리는 이란의 야심을 일찌감치 꺾어버리겠다는 의도다.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의 베네수엘라에 대한 석유 수출을 막기 위해 새로운 제재와 법적 조치를 검토 중”이라고 정부 관료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달 초 이란은 150만배럴, 4,550만달러(약 560억원) 상당의 석유제품을 실은 유조선을 띄웠고, 해당 선박들은 이달 말인 늦어도 내달 초까지 베네수엘라에 도착할 예정이다.
거래가 성사될 조짐을 보이면서 다급해진 트럼프 행정부는 선원 제재부터 자국 몰수 법안에 근거한 유조선 나포 등 다양한 대응 조치를 검토 중이다. 이미 해군은 ‘마약 단속’을 명분 삼아 전함 네 척을 카리브해에 배치해 압박에 나선 상황이다. 역내 긴장감이 고조되자 이란 측은 이날 “미국이 먼저 군사행동을 하면 비례적으로 맞대응 하겠다”고 응수했다. 블라디미르 파드리노 로페스 베네수엘라 국방장관도 “환영과 감사 의미로 군함과 전투기를 동원해 이란 유조선을 호위하겠다”고 선언했다.
두 나라의 밀월은 경제적 상부상조의 성격이 강하다. 오랜 기간 미국의 제재 탓에 이란은 석유 수출길이 막혔고, 베네수엘라는 낙후된 정유시설에 제재까지 겹치면서 고질적인 에너지난을 겪고 있다. 형편이 어려운 동지끼리 숨통 터주기에 나선 셈이다. 지난달에도 베네수엘라는 이란 마한항공을 통해 9톤 분량의 금을 이란에 전달했고, 대신 정유설비 정비에 필요한 물자ㆍ인력을 지원받았다.
반면 미국은 양국간 일련의 움직임을 반미 전선 강화와 이란의 중남미 영향력 확대라는 ‘안보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다. WSJ는 “중남미에 무역 및 정치적 전초기지를 세우려는 이란의 노력은 200년 동안 이어진 미국의 ‘먼로 독트린’에 대한 도전”이라고 분석했다. 19세기 이후 미국이 텃밭으로 여겨온 중남미를 이란이 건드렸다는 얘기다. 지난해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친(親)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가 베네수엘라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신문은 “트럼프 행정부 일각에서는 올해 1월 이란과 전면전 위기까지 갔던 상황을 고려해 일단 자제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라고 덧붙였다. 양국이 제재를 회피하며 석유 거래를 반복하는 정황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물리력 행사에 신중을 기하자는 것이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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