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향 사태 초반 등장한 친일 프레임
여권 조국 참사, 야권 총선 참패 연상
얄팍한 프레임정치론 절대 민심 못 얻어
뜻풀이가 더 어려운 단어들이 있다. 플랫폼, 패러다임, 거버넌스…. 정치언어 ‘프레임(frame)’도 그렇다. 상황을 분석하는 틀? 인식의 방법? 그런 백마디 설명보다, 차라리 ‘종북 프레임’, ‘친일 프레임’, ‘젠더 프레임’, ‘조국 대 윤석렬 프레임’ 같은 용례를 들었을 때 훨씬 명쾌하게 와 닿는다.
하도 듣고 읽어서 프레임은 더 이상 생소한 정치용어가 아니다. 인테리어나 조립 용도에 제격인 이 단어가 어떻게 한국정치의 보통명사로 정착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국에선 민주 공화 양당의 선거 전략을 분석할 때 오래전부터 ‘프레이밍(framing)’이란 표현이 자주 쓰였기 때문에 거기서 직수입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쨌든 프레임이 친숙한 정치용어가 됐다는 건, 그만큼 한국정치가 프레임 만들기에 능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프레임은 단순하고 선명하며 일방향성이 강하다. 주변 논의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그래서 매우 선동적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지지층을 결집하고 반대편을 공격할 때, 특히 수세에 몰려 상황 반전이 절실할 때, 프레임은 매우 위력적인 정치 도구가 된다. 예컨대 국가보안법상 반인권적 독소조항들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은 진영을 떠나 충분히 합리적이다. 하지만 보수에서 ‘종북 프레임’을 거는 순간 이념 문제가 되고 그 때부터는 한 발짝도 나가기 힘들어진다. 경직된 노동관계법을 유연하게 고치자는 요구는 누가 들어도 설득력이 있으며 사실 그 혜택은 대기업보다 중소기업, 실직자나 비정규직에게 더 크게 돌아간다. 하지만 진보와 노동계가 예의 ‘친재벌 프레임’을 꺼내 드는 때부터 국회 문턱을 넘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정치인들에게 프레임은 확실히 매력 넘치는 전략이다.
프레임 정치가 어긋나기 시작한 건 작년 여름 조국 사태 때부터였다. 법무부 장관 임명에 비판 여론이 고조되자 여권은 ‘보수의 공세’라는 이념 프레임으로, 이후 검찰 압박이 거세지자 ‘정치검찰 대 검찰개혁’ ‘윤석열 대 조국’ 대결 프레임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국민들은 공정성을 얘기하는데 이걸 보수화라고 역공하는 여권에 분노했다. 검찰개혁엔 동의하지만 그것이 왜 조국 수호여야 하는지, 윤석열과 조국이 왜 택일의 대상인지 납득할 수 없었다. 프레임의 실패였고, 그 잘못된 설정은 결국 문재인 정부 지지율의 하염없는 추락으로 되돌아 왔다.
보수 야당이 21대 총선에서 참패한 이유를 따지면 수십 가지겠지만, 결국은 프레임의 패배였다. 미래통합당의 전략은 시종 ‘반(反) 조국’ ‘경제 실정’ 프레임이었다. 물론 국민들이 조국 이슈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코로나, 필요한 건 경제 위기 처방인데 야당은 자꾸 8개월 전 조국 얘기, 그저 경제가 파탄 났다는 얘기만 반복하고 있으니 골수 지지층이 아닌 한 누가 표를 주겠는가.
윤미향 사태 초반 잠시나마 여권은 ‘친일 프레임’을 만지작거렸다. 영원히 묻혔을 뻔한 일제의 패역을 전 세계에 알린 위안부 운동의 아이콘을 비판하는 건 속칭 ‘토착왜구’ 곧 보수 친일세력의 공세라는 단순 선동 논리였다. 국민들은 의아했다. 여전히 일본의 태도에 분노하고 위안부 운동을 지지하고 있는데, 다만 여태껏 모인 기부금이 어떻게 쓰였는지 ‘투명성’을 얘기할 뿐인데 그건 답하지 않고 친일 운운하고 있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여권이 곧바로 ‘친일 프레임’을 접은 건 민심이 프레임 밖에 있다는 것을, 그대로 두면 제2의 조국 사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냉정히 말해 정치 과정 자체가 프레임 설정의 연속이다. 프레임 없는 선거란 불가능한 것도 맞다. 하지만 해묵고 얄팍한 정치공학적 프레임으론 절대 민심을 읽을 수도, 얻을 수도 없다. 우리나라 국민이 어떤 국민이고, 특히 젊은 층이 어떤 세대인지 이미 혹독하게 겪지 않았던가. 여전히 프레임 안에 국민들을 손쉽게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오만, 그런 오산도 없다.
콘텐츠본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