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남의 말 하는 재미는 신도 인간 못지않게 즐기나 보다. 올림포스 12신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의 피가 섞였다는 둥, 거짓말을 해서 위험에 처한 헤라를 구했다는 둥, 그 대가로 12신의 마지막 자리를 꿰찼다는 둥, 헤스티아가 양보해 가까스로 그 자리에 올랐다는 둥, 디오니소스를 두고 올림포스에 여러 말이 돌았다.
소문의 진상은 이렇다.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안 보이는 사슬이 달린 황금의자를 헤라에게 선물했다. 기분 좋은 나머지 헤라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장 사슬에 묶이고 말았다. “다리를 절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엄마라는 작자가 자기 자식을 버리다니!” 헤파이스토스는 ‘엄마’ 헤라에게 그렇게 복수했다. 여러 신이 헤라를 풀어 달라고 헤파이스토스에게 사정했지만, 그는 모든 청을 거절했다.
제우스는 양심이 찔렸다. 헤라와 싸울 때 엄마 편을 드는 헤파이스토스를 홧김에 던져 버린 적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어린 헤파이스토스는 다리를 크게 다쳐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사연이야 어찌 됐든 제우스는 시시때때로 바람을 피우며 아내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 헤라를 구하고 싶었다.
◇“헤라를 구하라” 제우스의 명령
골똘히 생각한 끝에 제우스는 디오니소스만이 헤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디오니소스가 가슴에 품은 한 또한 얼마나 깊던가! 이 사실을 제우스도 잘 알았다. 막상 디오니소스 앞에 서자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절박한 나머지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부탁을 받고는 망설였다. 헤라에게 당한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헤라 탓에 타지를 떠돌며 산전수전을 겪지 않았던가. 헤파이스토스는 복수할 엄마라도 있지만, 그는 엄마 세멜레 공주를 본 적조차 없었다.
세멜레 공주는 테베의 카드모스 왕의 딸이었다. 그녀는 제우스가 한눈에 반했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들은 불같은 사랑에 빠졌고 곧 아이가 생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헤라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헤라는 제우스의 본처이기 이전에 결혼과 가정을 관장하는 신이 아니던가. 그녀는 세멜레가 믿고 의지한 유모 베로에로 변장했다. “그분이 진짜 제우스인가요? 그러면 본모습을 보여달라고 하세요. 스틱스 강에 맹세하게 하면 그가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을 거예요.” 헤라에게 속아 넘어간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약속을 받아냈다.
제우스는 번민에 빠졌다. 제우스의 본모습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하던가. 어쩌자고 절대 어겨서는 안 되는 스틱스 강의 맹세까지 했을까. 제우스는 후회와 고민을 거듭한 끝에, 키클롭스가 만들어준 벼락을 지니고 가기로 결심했다. 제우스의 상징 가운데 그 벼락만은 가끔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세멜레를 지킬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신들의 제왕을 비껴갔다. 세멜레는 제우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빛을 이기지 못해 타 죽고 말았다.
◇애증의 관계, 제우스
제우스는 비통에 잠겼지만, 이내 슬픔을 삼키고 세멜레의 배에서 7개월 된 태아를 꺼내 자신의 허벅지에 넣고 키웠다. 이윽고 산달이 차자 아기를 허벅지에서 꺼냈다. 그 아기가 바로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의 출생에 관해서는 다른 전설도 전해진다. 제우스는 누이 데메테르와의 사이에서 페르세포네를 낳았다. 그런데 딸 페르세포네와도 관계를 맺어 디오니소스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다. 헤라는 불같이 화를 내며 티탄족더러 그 아기를 일곱 갈래로 찢어서 먹게 했다. 이를 알게 된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간신히 아기의 심장만은 빼돌릴 수 있었다. 아테나에게 건네받은 아기의 심장을 제우스는 재빨리 삼키고는, 세멜레를 유혹해 그녀의 자궁에서 디오니소스를 되살려냈다. 아기는 두 번 태어났다고 해서 자그레우스라는 이름도 얻었다.
디오니소스(Dyonisos)의 이름엔 세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dia(제우스)’와 ‘nyos(아들)’ 즉 제우스의 아들, ‘dyo(둘)’와 ‘nys(태어나다)’ 즉 두 번 태어난 자, ‘Nysa(니사)’의 ‘(Dias)디아스’ 즉 니사 산의 제우스. 훗날 로마신화에서는 바쿠스로 불리는데, 이는 포도나무의 싹을 뜻하는 바코스(Bakchos)에서 유래했다.
과정이야 어떻든 아이를 얻었으니 이제 제우스는 키울 일이 걱정이었다. 혹시라도 헤라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사달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제우스는 세멜레의 언니인 이노와 그의 남편 아타마스에게 아이를 키워 달라며 몇 가지를 당부했다. 여자아이처럼 키울 것, 실내의 여자들 구역에 머물게 할 것, 낮에는 특히 조심할 것.
그런데 세상에 비밀은 없다. 누군가가 헤라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분노에 휩싸인 헤라는 이노와 아타마스 부부에게 광기를 불어넣었다. 부부는 광기에 휩싸여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디오니소스 역시 광기에 사로잡혔다. 이를 지켜보던 대지의 여신 레아가 디오니소스에게서 광기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신성을 불어 넣었다. 레아는 제우스와 헤라를 낳은 어머니이자, 크로노스의 아내이다. 디오니소스에게는 친할머니인 셈이다.
두 살배기 아기 디오니소스가 양부모를 잃게 되자,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시켜 어린 디오니소스를 소아시아의 니사 산으로 데려갔다. 헤르메스는 히아데스라 불리는 일곱 님프에게 아이를 맡기고는, 헤라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여자 옷을 입혀 동굴에서 키워 달라고 부탁했다. 디오니소스는 (페니키아와 이집트 사이 어디쯤에 있는, 아라비아로 추정되는) 니사 산에서 님프들과 반인반수 사티로스들의 돌봄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유년기를 지나 청소년이 된 디오니소스는 동굴 속이 무척 답답했다. 가끔은 트라키아와 리디아(터키 서부)를 여행하면서 답답함을 달랬다. 리디아를 여행하던 중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디오니소스의 스승이자 양부인 사티로스 세일레노스가 무리에서 이탈해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농부들은 그를 붙잡아 고르디온의 궁전에 사는 미다스 왕에게 데려갔다. 그런데 미다스 왕은 그 노인이 누군지 알았기에 처벌하기는커녕 극진히 대접했다. 열 하루가 되던 날, 미다스 왕은 세일레노스를 디오니소스에게 안전하게 돌려보냈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 왕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미다스 왕은 자신이 만지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했다. 미다스 왕은 곧 그 능력을 후회했고, 디오니소스는 소원을 되돌릴 수 있는 비법도 알려줬다.
그러던 어느 날 디오니소스는 님프와 사티로스 사이에서 태어난 미소년 암펠로스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사랑도 잠시 암펠로스가 사고로 죽고 말았다. 슬픔에 잠긴 디오니소스는 야생 포도나무 가지를 잘라 그의 무덤가에 꽂았다. 다음 날 포도나무가 뿌리를 내리더니 포도가 주렁주렁 열렸다. 지금도 ‘암펠로스’(Ampelos)는 그리스어로 포도나무를 뜻한단다.
◇암펠로스와의 사랑, 포도주의 기원
포도 맛은 암펠로스와의 사랑만큼이나 달콤했다. 암펠로스와의 안타까운 사랑을 포도 맛으로 달래던 디오니소스는 어느 날 묘한 액체를 발견했다. 전날 따 놓은 포도가 무게에 짓눌려 즙이 나오더니 맛이 변해 갔다. 쌉싸래한 검붉은 액체를 마시니 마법처럼 금세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닌가! 디오니소스는 암펠로스 무덤에서 포도나무 가지를 잘라 니사 산 곳곳에 심고는, 사티로스와 함께 포도나무 재배법과 양조법을 본격적으로 익혔다.
니사 산 주변에는 나중에 마에나데스 혹은 바카이라 불리게 되는 여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포도주를 마시며 사티로스들과 어울려 디오니소스를 숭배했다. “이오바코스(Iobacchos)!”라고 외치며 디오니소스를 포도나무와 포도주의 신으로 추앙했다. 그들이 행한 의식은 훗날 디오니소스(바쿠스) 축제로 이어졌고 그리스 비극으로 상연되었으며 연극의 기원이 되었다. 디오니소스는 이들과 함께 소아시아를 넘어 인도에까지 이르렀다. 가는 곳곳에 포도나무 재배법과 양조법을 전파하며 신앙을 퍼뜨렸다.
인도에 간 지 3년 만에 돌아온 디오니소스는 트리기아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거쳐 마침내 그리스 본토로 들어가 포도나무를 심었다. 디오니소스는 자신이 터득한 포도나무 재배법과 와인 양조법을 특별히 아테네 인근에 사는 농부 이카리오스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는 와인을 만들어 친구들에게도 맛 보였다. 그런데 와인을 마신 친구들이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몽롱해지면서 어질어질해지자 이카리오스가 자신들을 속여 독약을 먹였다고 생각해, 그만 이카리오스를 찢어 죽이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디오니소스는 슬퍼하며 이카리오스를 목동자리로 만들어 밤하늘을 수놓았다. 이때부터 고대 그리스에서는 와인을 그대로 마시면 위험하다고 여겨, 물에 와인을 섞어 마셨다고 한다.
얼마 후 디오니소스에게 또 다른 위기가 닥쳤다. 낙소스 섬을 향해 가던 중 에트루리아인 해적에게 납치되고 만 것이다. 그때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붉은 포도주가 갑판을 타고 흘러내리는가 하면 금세 자라난 포도덩굴이 해적선을 휘감았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디오니소스는 사자로 변해 해적들과 맞섰다. 놀란 해적들이 바다로 뛰어들었고, 그들은 돌고래로 변했다.
무사히 낙소스 섬에 도착한 디오니소스는 해변에 잠든 아리아드네라는 여성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녀는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의 딸이었다.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를 사랑한 나머지 부모와 고국을 버리고 테세우스를 따라나섰는데, 그녀가 잠든 사이 테세우스가 떠나 버리고 만 것이다. 사연을 들은 디오니소스는 홀로 남겨진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소식을 들은 아프로디테는 남편 헤파이스토스에게 부탁해 루비 아홉 개가 장식된 금관을 특별히 만들어 아리아드네에게 선물했다.
참으로 숱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디오니소스는 고개를 마구 젓더니 이내 결심한 듯, 헤라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 헤라를 구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는 자신의 특기로 만든 와인에 거짓말을 조금 보태기로 했다.
◇마침내 어머니를 구해내다
이윽고 디오니소스는 이복형 헤파이스토스를 찾아갔다. “헤파이스토스여, 이 와인은 신들의 음료 넥타르보다 맛있답니다. 암브로시아에 곁들여 한잔 들이키세요. 많이 마실수록 행복해진답니다.” 헤파이스토스는 디오니소스의 말에 혹해 연거푸 와인을 마셨다. 그는 정신이 몽롱해진 탓에 그만 황금의자의 사슬을 풀어주고 말았다.
디오니소스는 헤라와 헤파이스토스 모자(母子)를 보니 한 번도 본적 없는 엄마 세멜레가 그리웠다. 헤라도 구했겠다, 제우스를 졸라 허락을 받아 낸 디오니소스는 이복형제 헤라클레스에게 조언을 구해 하계로 내려가 세멜레를 구해 돌아왔다. 세멜레는 올림포스에 올라 티오네 신이 되어, 디오니소스의 효도를 받으며 지금도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신들의 입방아가 괜한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디오니소스는 신들의 수근거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자신도 어머니를 구하지 않았는가! 물론 지난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면, 잔에 담긴 와인 속에 숱한 역정의 풍경이 어른거렸다. 어느새 그는 와인잔을 그러쥐고는 딴청 피우듯 불쑥 내뱉었다. “와인이 넥타르보다 맛있다는 말이 왜 거짓말인가!”
시대의창 대표ㆍ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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