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는 도덕과 다른 학습된 실천
정의연대에 깐깐하게 묻고 따지듯
언론 스스로도 끊임없이 자문해야
A시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시의회 B의원을 살충제 업계의 대변자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가 살충제 회사에 고용돼 지역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치는 살충제에 관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는 것. 회견이 끝난 시각은 마감을 코앞에 둔 오후 5시15분. 지역신문 C기자는 바로 B의원을 접촉해 “근거 없는 정치적 음모”라는 반박을 담아 1면 기사를 썼다.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A시장은 “양쪽 주장을 함께 실은 바람직한 보도로 판단은 독자의 몫”이라며 만족했고, B의원은 “기자가 독자적으로 취재해 근거가 없다면 기사를 내지 말았어야 한다”며 격분했다. 누구 말이 옳은가. 언론이 사회적 이슈를 보도할 때 주장된 사실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전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사실과 진실은 어떻게 다른가. 객관보도는 진실 추구라는 언론의 이상에 부합하는가.
미국 언론학자 필립 패터슨과 리 윌킨스가 수업 교재로 집필한 ‘미디어 윤리의 이론과 실제’에 나오는 사례 연구 중 하나다. 책은 윤리적 판단의 지침이 되는 이론과 경험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백미는 동료 학자와 기자들이 참여해 구성한 실제 혹은 가상의 사례 40여 편을 제시하고 구체적 이슈에서 보편적 원칙으로 논의를 넓혀 갈 수 있도록 깨알 같은 질문을 던진 대목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윤리는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논의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다. 도덕(morals)이 종교 또는 신념의 영역에 속한다면, 윤리(ethics)란 복수의 가치가 충돌하는 갈등적 상황에서 원칙에 기초한 합리적 판단을 내리는 과정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는 종종 옳고 그름의 이분법이 아니라 도덕적인 측면에서 좀 더 나은 선택이 무엇인가를 의미한다”고 이들은 강조한다.
한국의 사례들로 언론 윤리 교과서를 쓴다면 요즘 가장 뜨거운 이슈인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더불어시민당 국회의원 당선자를 둘러싼 논란도 넣을 만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씨의 문제 제기로 시작된 논란은 부실 회계 문제로 번졌고 안성 쉼터 고가 매입 및 헐값 매각, 윤 당선자의 아파트 매입 자금 출처 등 비리 의혹까지 불거졌다. 이 과정에서 부실 회계 증거들이 드러났고, 정의연과 윤 당선자의 어설픈 해명이 논란을 키웠다. 그러나 사건이 ‘사태’로 비화하면서 충분한 근거 없이 비리 의혹으로 몰아가는 부실한 기사도 쏟아졌다. 정의연에 진실된 해명을 요구하는 것과 별개로, 언론도 의혹 제기에 앞서 스스로에게 깐깐한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가령 쉼터 논란과 관련해 당시 서울 마포에도 실거래가 10억원 이하 단독주택이 즐비했고 안성 쉼터 매입가가 주변 시세보다 높았다는 사실만으로 무언가 구린 배경이 있을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온당한가. 미래통합당 관계자들의 일방적 주장을 기자가 확인 취재 없이 받아 써도 인용부호를 달고 워딩을 정확히 옮겼다면 사실보도로서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괜한 꼬투리 잡기가 아니다. 유사한 사건들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 보편적인 원칙이 무엇인지 끈질기게 묻고 따져야 한다. 기자는 기사를 취재하고 보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내렸던 윤리적 판단의 근거를 독자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없이 “그때는 그게 옳다고 믿었다”는 어설픈 변명만 되풀이해서는 무너진 신뢰를 회복할 수도, 평판을 심각하게 갉아먹는 진영 논리의 블랙홀을 벗어날 수도 없다.
패터슨은 미디어 윤리가 ‘선험적 진리’가 아니라 ‘학습된 실천’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강의도 온통 질문과 토론으로 채워진다. 그는 “도대체 정답이 무엇이냐”는 한 학생의 물음을 농담으로 피해 갔는데, 같은 질문을 다시 받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고 했다. “정답은 여러분 자신 속에 있다. 그 정답은 미디어 윤리 이슈들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부단히 씨름해야만 나타날 것이다.”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이 길을 걸어가려는 젊은 기자들에게도 같은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이희정 미디어전략실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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