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상대적으로 힘을 못 쓰는 걸까. 러시아는 20일 현재 누적 확진자 수가 30만명에 육박해 세계 2위 발병국이 됐지만, 사망자 비율(치명률)은 1%도 안 되는 세계 최저 수준이다. 이를 두고 구 소련 체제가 남긴 부실한 의료시스템에다 왜곡ㆍ거짓이 일상화한 권위주의 정치체제가 통계 조작을 당연시한 결과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19일(현지시간) “정작 의료진 치명률에선 러시아가 감염 수준이 비슷한 다른 나라들보다 최대 16배 높다”며 “러시아의 통계는 지나친 장밋빛”이라고 지적했다. 확진자 전체로 볼 때 러시아의 치명률이 ‘방역 모범국’으로 꼽히는 독일이나 한국보다도 훨씬 낮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앞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예년 대비 ‘초과 사망자 수’를 근거로 역추산한 코로나19 사망자가 공식 통계보다 1.72배 많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뉴욕타임스가 같은 방식으로 계산한 수치는 무려 3배가 넘었다.
이에 대해 구 소련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가 투명한 보고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비판이 많다. 이코노미스트는 “돈과 지위를 크렘린궁에 의존하는 지방 관료들의 목표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실례로 ‘핫스폿’ 중 한 곳인 다게스탄공화국의 보건장관은 최근 “공화국 내 공식 사망자는 27명이지만 병원ㆍ진료소에서 폐렴 증상을 보이다 숨진 환자는 657명”이라고 폭로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의료진과 지방당국이 (크렘린궁에) 나쁜 소식을 전하는 것을 두려워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트는 “크렘린궁의 대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개방정책인 글라스노스트를 시작하게끔 만들었던 체르노빌 원전 참사 당시의 은폐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소련 정부는 1986년 사고 발생 후 은폐ㆍ축소로 일관하다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을 받은 뒤 개혁ㆍ개방에 나섰는데, 이 과정이 구 소련 붕괴의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부실한 공중보건시스템도 도마에 올랐다. 푸틴 대통령은 2000년 집권 이후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저품질ㆍ비효율을 전전했던 의료제도 개혁에 나섰지만 지역간 의료격차와 부실한 1차 의료체계 등 고질적 문제는 여전하다고 블룸버그는 지적했다. 이번 사태에서도 전체 인공호흡기 4분의 1이 모스크바에 집중된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선 기저 질환자 사망은 아예 제외하는 러시아의 보수적인 집계 방식을 낮은 치명률의 이유로 들기도 한다.
연내 개헌으로 종신집권을 꿈꾸는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은 ‘코로나 복병’ 탓에 이달 초 역대 최저(59%)를 기록했다. 하지만 코로나 대응 방침이 변화할지는 미지수다. 니콜라이 페트로프 러시아 고등경제대 교수는 “푸틴의 정치적 기반은 대기업ㆍ은행ㆍ국영기업”이라며 “그는 (코로나로) 고통받는 국민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