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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유일한 왕정국가 사우디… 여성을 앞세우기 시작했다

입력
2020.05.23 04:3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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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영석유회사가 절대적 수익원… 민간은 그 수익을 나눠갖는 구조 

 90% 이상이 외국인 노동자들… 국가의 복지는 왕족의 자비 같아 

 첫 남녀공학ㆍ아람코 상장 등 서서히 여성 비중 높아지는 시대 

작년 12월8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사우디아라비아와 바레인 간 제24회 걸프컵 결승 경기가 열리고 있는 압둘라 빈 칼리파 경기장에서 두 여성 축구팬이 사우디 국기를 들고 사우디 팀을 응원하고 있다. 도하=EPA 연합뉴스
작년 12월8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사우디아라비아와 바레인 간 제24회 걸프컵 결승 경기가 열리고 있는 압둘라 빈 칼리파 경기장에서 두 여성 축구팬이 사우디 국기를 들고 사우디 팀을 응원하고 있다. 도하=EPA 연합뉴스

[글로벌 경제유람] <4>지구상 가장 보수적인 나라, 사우디아라비아

 ※ 오늘날 세계경제는 우리 몸의 핏줄처럼 하나로 연결돼 있습니다. 지구촌 각 나라들의 역사와 문화, 시사, 인물 등이 ‘나비효과’가 되어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인문학과 경영, 디자인, 사회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경제학자의 눈으로 세계 곳곳을 살펴보려는 이유입니다.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가 <한국일보>에 3주에 한번씩 토요일 연재합니다. 

중동아시아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는 가장 먼저 ‘석유’가 떠오르는 나라다. 조금 더 관심이 있다면 ‘축구’나 ‘사막’ 같은 키워드가 연상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경제나 사회제도적으로 볼 때 사우디라는 나라는 매우 이색적인 나라다. 21세기에 공존하는 다른 국가들 중 유사한 사회제도나 경제 구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사우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국영석유회사가 유일한 수익원… 납세 의무 없어 

먼저 국가의 운영체계부터 여타 국가와는 전혀 다르다. 일반적인 국가들은 영리를 추구하는 경제활동을 개인이나 기업과 같은 민간 부분에서 수행하고, 국가는 이들의 수익 일부에 세금을 부과하여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국가 살림이 운영된다. 하지만 사우디는 경제활동의 주체가 개인이나 기업과 같은 민간 부분이 아니라 국영석유회사가 국가의 절대적인 수익원으로 경제활동을 국가가 직접 수행하고, 민간은 국가가 벌어들인 수익을 나누어 갖는 구조다.

이런 까닭에 사우디에서는 정부와 국민 사이에 세금 문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일이 없다. 국민들이 세금을 거의 내지 않기 때문이다. 사우디 재정 수입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원유를 판매한 돈을 바탕으로 국민들은 광범위한 혜택을 누린다. 교육과 의료 서비스는 물론이고 전기 등의 에너지도 싼 값에 제공받을 수 있다.

석유를 판매한 돈의 상당액은 사우디 왕가로 흘러 들어간다. 사우디 국민들은 정부의 연간 예산 편성에 대한 발언권이 거의 없으며, 정부 또한 국민에게 지출의 일부분만을 공개하고, 원유를 판매한 수익원 중 왕가 할당분이 어느 정도인지는 공개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구조에 대해 크게 불만을 표명하는 분위기도 아니다.

이처럼 국가가 경제활동의 절대적인 비중을 직접 수행하고, 이에 대한 과실을 국민들에게 나누어준다고 해서 사우디 국민들이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국민의 40퍼센트 가까이가 빈곤층에 해당하며, 적어도 60퍼센트 가까운 국민들이 집을 구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결혼 적령기 청년 중 절반 정도는 직업이 없거나 결혼 지참금을 만들지 못해 결혼을 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국민 대부분의 경제 상황이 이렇다 보니,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우디 왕자들의 호화스러운 생활과 달리 2만 달러 초반 수준으로 우리나라보다 낮은 수준이다.

[저작권 한국일보] 작년 12월8일 사우디아라비아는 식당 등 공공장소에서 남녀 출입구와 자리를 따로 두도록 하는 규정을 폐지했다. 외국 기업의 투자를 촉진하고 기업활동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조치다.
[저작권 한국일보] 작년 12월8일 사우디아라비아는 식당 등 공공장소에서 남녀 출입구와 자리를 따로 두도록 하는 규정을 폐지했다. 외국 기업의 투자를 촉진하고 기업활동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조치다.

 ◇경제활동도 외국인 노동자에 의존 

한가지 특이한 대목은 사우디 내부에서 왕성하게 경제활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외국인 노동자라는 점이다. 사우디에 출장을 가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이를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공항에 도착해서 호텔에 들어갈 때까지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우디 현지인이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아 건너온 외국인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항의 수화물 관리자는 인도나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가운데 한 나라 출신인 경우가 많다. 공항을 빠져 나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사우디 택시기사 대부분은 파키스탄 사람들이며, 호텔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도어맨 역시 인도나 파키스탄, 레바논 출신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실제로 민간 경제 부분에서 외국인 근로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90%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사우디에 도착해 한 시간이 넘도록 사우디 사람을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이 때문에 사우디 정부는 외국인들의 입국을 제한하는 비자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우디인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자국 국민을 의무적으로 고용하는 목표치를 발표하고 권장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사우디인들이 이미 외국인을 기반으로 한 경제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다. 외국인을 채용하기 위한 비자 자체가 매매되고 있는 현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외국인을 대거 고용할 수 밖에 없는 국영기업들에게 외국인을 입국시킬 수 있는 비자를 몰래 사들여 이를 활용하는 것이다.

 ◇복지제도는 ‘왕족들의 자비’와 같은 말 

사회제도와 법률 부분에서도 독특한 점이 많다. 사우디는 세계 주요 국가 중 거의 유일한 전제군주국가다. 왕이 존재하거나 왕이 통치에 일부 관여하는 국가들은 많지만, 대부분은 법에 의해 군주의 권력을 일정 정도 제약하는 입헌군주제 국가들이다. 하지만 사우디는 왕가가 국가의 통치권을 장악하여 자율적으로 행사할 수 있으며, 국가기관은 오로지 사우디 왕가의 권력을 집행하는 기관에 불과한, 진정한 의미의 전제군주국가라 할 수 있다.

종교가 지배하는 국가인데 왕가의 자율성이 얼마나 있겠냐고 의구심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우디 왕가는 종교적 율법까지 탄력적으로 해석하게 만들 정도로 종교계까지 장악하고 있다. 일례로 1990년 사우디 국왕이 사담 후세인과 맞서기 위해 미국 군대를 성지 인근에 배치하는 것을 허용한 바 있다. 이때 사우디 종교지도자들은 성지 인근에 이단을 배치하면 안 된다는 종교적 율법을 제시하기는커녕 순순히 국왕의 의견에 동의해 논란이 된 바 있다.

사우디는 복지제도 또한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사우디의 복지제도는 ‘왕족들의 자비’와 같은 의미다. 사우디 국민 중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한 사안이 있다면 왕족들 집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해외에 나가 공부를 하고 싶은 국민이 있다면, 직업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부모님이 아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이들 모두 사우디 왕가의 자비를 통해 자신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작년 11월 사우디아라비아 다란에서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의 아민 나세르(왼쪽) 최고경영자(CEO)와 야시르 알-루마얀 회장이 기자회견을 갖고 기업공개(IPO) 계획을 공식 발표하고 있다. 다란=EPA 연합뉴스
작년 11월 사우디아라비아 다란에서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의 아민 나세르(왼쪽) 최고경영자(CEO)와 야시르 알-루마얀 회장이 기자회견을 갖고 기업공개(IPO) 계획을 공식 발표하고 있다. 다란=EPA 연합뉴스

 ◇사상 첫 ‘남녀공학’ 설립… 확산되는 개혁의 바람 

이쯤 되면 ‘21세기에도 이런 국가가 있나’ 의구심이 생기는 게 사실이다. 현 시대에 존재하는 국가라고 보기 힘든 면이 너무 많으니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사우디 내부에서도 이 같은 제도들이 구시대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제도를 탈피하려는 시도도 점차 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의 경제활동이다. 사우디 여성들은 종교적 전통 때문에 가족에게 전적으로 예속되어 있다. 혼자서 운전을 하거나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철저히 제한돼 대부분 여성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사회 발전에 기여하지 못한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여성들에게 다양한 직업 교육과 고등 교육이 제공되는 추세다. 석유의 가채연수((可採年數ㆍ부존량을 생산량으로 나눈 값)가 점점 줄어들면서 인구의 절반인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종교적 율법도 탄력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2009년 압둘라 사우디 국왕은 열악하기로 악명 높은 왕국의 교육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킹 압둘라 과학기술대학(KAUST)올 설립했다. 하버드 다음으로 높은 기부금을 자랑하는 이 대학은 사우디 최초의 ‘남녀공학’이었다. 종교지도자들은 남녀공학 대학이 이슬람 율법에 위배된다고 비판하고 나섰는데, 사우디 국왕은 이를 주도한 종교지도자들을 즉시 해임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그러자 다른 종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남녀공학 대학 설립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작년 말에는 ‘공공장소 남녀 부동석(不同席)’이라는 금기도 깨졌다. 사우디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사회 전반에 걸쳐 추진중인 대대적인 개혁의 바람 속에서 가장 보편적인 규율 중 하나였던 남녀 분리의 원칙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국가의 유일한 수입원이라 할 수 있는 국영석유회사 아람코(ARAMCO)를 주식시장에 상장해 세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아람코의 영업이익은 2018년 기준으로 2,240억달러에 달하는데, 우리나라 돈으로 약 254조원 규모다. 이는 애플과 삼성전자, 구글의 영업이익을 합친 금액인 1,998억 달러보다 많은 금액이다. 사우디가 왕실의 자금줄인 아람코를 주식 시장에 상장한 이유는 상장을 통해 외부 투자자금을 확보하여 사우디아라비아의 신규 투자를 적극 추진하기 위함이다. 이 과정에서 사우디 왕실은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아람코의 재무재표를 80년만에 최초로 공개했다.

사우디 왕실의 이 같은 파격 행보는 그 자체로 사우디가 놓인 환경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십 년 넘게 지탱해온 그들만의 사회ㆍ경제 구조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박정호 명지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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