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개봉한 ‘지구를 지켜라’(감독 장준환)는 한국 영화계 숨은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지구가 외계인의 위협에 놓여있다는 강박에 빠진 청년 병구(신하균)가 외계인으로 여기는 화학회사 사장(백윤식)을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다. 기발한 상상력, 재치 있는 연출로 호평받았으나 흥행 성적은 전국 7만3,132명에 그쳤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지난 7일, 대반전이 일어났다. 할리우드에서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메가폰은 장 감독이 다시 잡는다.
‘지구를 지켜라’ 리메이크는 한국 영화에 대한 할리우드의 시선과 대우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전의 리메이크 작은 한국에서 크게 흥행하거나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 상을 탄 영화들이었다.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올드보이’(2003), 1,626만명이 본 ‘극한직업’(2019), 736만 관객을 모은 ‘써니’(2011)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 또한 그랬다.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2005) 등으로 이름을 얻은 뒤 ‘스토커’(2013)를 만들 수 있었다. 김지운 감독도 ‘달콤한 인생’(2005)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9)을 발판 삼아 ‘라스트 스탠드’(2013)를 연출했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는 ‘괴물’과 ‘설국열차’가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지구를 지켜라’ 리메이크는 3년 전 장 감독이 무심코 던진 말로 시작됐다. 그 때 장 감독은 CJ ENM 해외팀 관계자에게 할리우드 리메이크를 제의했다. “국내 흥행이 잘 안돼 미안한 마음에 깊은 생각 없이 내놓은” 말이었다. 해외팀은 장 감독의 말을 흘려 듣지 않았다. 공포 영화 ‘미드소마’(2019) 등을 만든 아리 에스터 감독이 ‘지구를 지켜라’의 열성 팬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리메이크 의사를 묻자 흔쾌히 받아들였다. 장 감독은 “마침 영화사를 설립하려던 에스터 감독이 제작을 맡게 됐다”며 “17년 전 안 본 사람들이 많아 다시 만들면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할리우드판 ‘지구를 지켜라’는 내년 상반기 촬영에 들어간다.
오스카 4관왕 ‘기생충’(감독 봉준호) 효과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 연예전문 매체 할리우드 리포터와 인디와이어 등은 ‘지구를 지켜라’ 리메이크 소식을 전하며 ‘기생충’ 투자배급사 CJ ENM의 새 기획임을 강조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지구를 지켜라’의 사례는 이제 영화 내용과 감독의 재능만으로도 할리우드 진출이 가능해졌다는 의미”라며 “‘기생충’ 4관왕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줬을 것”이라 말했다. 이어 “소수가 열광한 ‘지구를 지켜라’가 뒤늦게 주류에 편입하는 모습은 변방의 한국 영화가 세계 주류가 되는 과정과 비슷해 매우 상징적”이라고 덧붙였다.
정병길 감독의 최근 행보도 눈 여겨 볼만하다. 지난 4일 미국 언론에 따르면 정 감독은 미국 에이전시 CAA와 전속계약을 맺었다. 톰 크루즈, 톰 행크스, 올리버 스톤 등이 속한 CAA는 미국 3대 에이전시로 꼽힌다. 스턴트맨 출신인 정 감독은 ‘우린 액션배우다’(2008)로 데뷔한 후 액션영화를 꾸준히 찍었다. 2018년 공개한 ‘악녀’는 관객 120만명에 그쳤으나, 할리우드는 정 감독의 액션에 주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 감독은 제라드 버틀러 주연의 액션 영화 ‘애프터번’를 연출 중이다. ‘악녀’의 미국 드라마 버전도 촬영할 예정이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악녀’ 같은 여성 액션 영화에 열광하는 미국 관객의 특징을 감안한 것”이라며 “이제 미국에서도 독자적 기획이 가능한 시대가 됐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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