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창(窓)] 경제위기에서 복지국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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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창(窓)] 경제위기에서 복지국가까지

입력
2020.05.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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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과 경제위기마다 복지정책은 강화돼

코로나발 경제위기, 사회안전망 확충 기대

합리적 정책과 재원 마련 계획 세워야

©게티이미지뱅크

역사를 들여다보면 재난이 복지국가 확대의 계기가 되었던 굵직한 사례들이 적지 않다. 미국은 대공황의 늪에 빠져 있던 1935년 고령연금, 실업보험 등을 골자로 하는 사회보장법을 제정하여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영국 복지국가 건설의 기초가 되었던 베버리지 보고서는 런던이 폭격을 당하고 있던 시기에 작성되었고 전후 폐허 위에서 제도화되었다. 우리나라도 1998년 외환위기의 충격을 극복하는 가운데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되고 사회보험 적용 대상이 확대되는 등 복지제도가 한층 강화되는 경험을 한 바 있다.

그러면 경제위기와 같은 재난은 어떻게 복지국가의 형성에 영향을 미칠까? 대공황기 미국의 사례는 이 과정을 잘 보여준다. 당시의 다른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대공황 이전의 미국에서는 산업구조 변화와 기술 진보의 뒤안길로 밀려난 피해자들이 대규모로 발생하면서 새로운 사회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은 19세기 말 이후 줄곧 요구되었지만, 미국의 공적인 복지제도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늦은 1930년대에 와서야 만들어졌다. 이러한 지연의 주된 이유는 연방정부의 적극적인 경제적 개입에 대한 미국 특유의 정치적ㆍ사법적 거부감이었다. 개인주의, 자립성, 자발성을 강조하는 정치적ㆍ사회적 전통도 대규모 복지프로그램의 태동을 가로막는 역할을 했다.

대공황의 발생은 산업화 시기를 통해 이미 한계적인 위치로 몰려나고 있던 취약계층의 어려운 경제적인 형편을 극단적으로 악화시키고 이를 보다 극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사회안전망 구축에 대한 정치적인 요구를 한층 강화하였다. 심각하고 광범위한 피해를 목격하면서 대중은 실직이나 빈곤이 개인적인 문제의 산물만이 아니며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사회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민간 주도의 과격한 정치적 운동이 부상하면서 기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급진적인 개혁이 요구된다는 인식도 확산되었다. 이러한 여건은 복지제도에 대한 문화적인 거부감을 완화하였고, 경제적 재난에 대응하기 위한 연방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정치적ㆍ사회적 분위기를 변화시켰다.

코로나19가 초래한 이번 경제위기는 복지국가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될까? 그 가능성은 점차 커지는 것으로 보인다. 일자리 시장이 받은 심각한 타격에 대응하여 정부는 고용안전망 강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3주년 대국민 특별연설에서 전 국민 고용보험 시대의 기초를 놓겠다고 천명하였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지급되기 시작한 재난지원금은 위기 대응을 위한 일회적인 조치로 추진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기본소득 도입을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경제적인 변화로 인해 복지 확대의 필요성이 발생하더라도 문화적ㆍ정치적ㆍ사법적인 관성과 경직성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빠르게 제도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근래의 산업구조ㆍ기술 변화와 함께 빠르게 늘어난 새로운 유형의 취약계층이 여전히 기존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실정이다. 이번 재난의 충격이 제도적인 관성과 경직성을 타파함으로써 우리의 사회안전망을 현재의 경제적 현실과 부합하는 방향으로 강화할 수 있다면 위기를 기회로 삼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두 가지 주문을 덧붙이고자 한다. 첫째, 재난에 맞서기 위한 임시적인 조치와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장기적인 정책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마련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한 여러 가지 전망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위기 상황을 먼 미래까지 투영할 만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한번 만들어진 제도는 쉽게 바꾸기 어려운 만큼 오래 존속될 정책의 수립에는 신중해야 할 것이다. 둘째, 복지 확대를 위한 재원의 마련은 매우 중요하다. 재난이 드러낸 사회안전망 확대의 필요성과 함께 합리적이고 투명한 재원 조달 계획을 국민에게 잘 설명하고 그 부담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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