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내게 나무와 관련한 사람이었다. 목재공장에서 평생을 보내셨기 때문이다. 회사는 옮겨도 목재 일을 하는 건 다르지 않았다. 오래전 어느 휴일, 아버지가 어린 나를 데리고 공장에 나간 적이 있었다. 회사가 어려워지고 있을 때였는데, “그래, 아빠 회사가 어떻든?” 하고 묻자 다섯 살의 내가 “응, 망하게 생겼더라” 답했다고 했다. 어린 내게 회사의 흥망을 가늠하는 촉이 있었을 리는 없고 대체 왜 그런 엄청난 말을 했을까. 내가 부도나 실직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저 어른들 대화를 들은 게 생각나, 나도 그쯤은 알겠더라, 정말이더라 호응했을 뿐일 것이다. 나중에 커서 실직과 폐업의 무게에 대해 알고 나서는 가족들이 그 일화를 얘기할 때면 나는 마음 한편이 시큰거릴 정도로 미안해졌다.
누군가의 직업은 자신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중요한 호명이 된다. 그래서 영어 이름에는 양장점 일을 하는 사람에게서 시작된 테일러나 요리와 관련된 직종에서 시작된 쿡 같은 성씨가 있는 것일 테다. 내 주변만 해도 장어집 딸, 과수원집 아들로 자기를 소개하는 친구들이 있고, 조카들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아빠 쪽 할머니와,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엄마 쪽 할머니를 구분해서 말하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시장과 슈퍼마켓은 가치 판단의 대상이 아니고 할머니들이 지금까지 일구어온 노동의 공간, 그렇게 해서 삶을 경영한 터전이 된다. 그렇게 구분한다면 나는 아마 아버지가 오랫동안 해왔던 그 일에 따라 ‘나무 하는 사람’의 출신이 될 것이다. 아버지는 대체로 목재 공장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아왔지만 종종 두툼한 나무토막 같은 것을 가져와 주말이면 무언가를 만들곤 했다. 섬세하게 조각해서 색을 칠하고 니스를 발라 완성한 그 나무조각품들. 한동안은 잘 보관해 왔는데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고 그것이 아주 아쉬워진다.
물리적 거리 두기 탓에 한동안 보지 못하던 부모님을 어버이날 드디어 만났다. 아버지는 그새 8㎏이나 체중이 줄어 있었다. 당뇨가 온 탓이었는데, 그렇게 갑자기 말라버린 아버지는 어느 때보다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엄마가 혈당 측정할 시간이 되었다고 하면 약간은 어색하게 와서 손가락을 내밀었고, 즐겨 드시던 많은 음식들을 단번에 끊어내야 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생활습관 탓에 당뇨가 왔다며 이번 기회에 고쳐야 한다고 약간은 몰아붙였다. 은근히 아버지 편을 들고 싶어진 나는 유전적 요인일 거라고, 아버지 잘못이 아니라고 두둔했다. 언니도 아이를 낳고 당뇨로 고생을 했고 나 역시 건강검진을 하면 당뇨 주의 경고가 뜬다고. 하지만 내 의도와는 다르게 아버지는 언니와 내게 그런 증상이 있는 것에 대해 자기 탓을 하며 미안해했고, 어버이날은 그렇게 또다시 핀트가 어긋난 나의 발언 속에 어색하게 끝이 났다.
은퇴 후에도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목재공장을 누비며 헤아릴 수 없이 멀리서 온 그 다종다양의 나무들을 항구에 부리고 가공하고 처리해 전혀 다른 형태와 목적을 가진 또 다른 완성품으로 만들어온 사람이라고 항상 느낀다. 그렇게 나무 하는 사람으로 살았던 아버지 이야기를 여러 번 소설로 쓰고 지금도 그때의 아버지가 해주었던 자신의 일에 대한 많은 얘기들이 세상을 보는 중요한 시선으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목재들이 배에서 내려져 항구까지 올 때 뗏목처럼 묶여 바다를 건넌다고 알려준 사람이었다. 나무들에게는 함수율이라는 것이 있어 어떤 경우에도 완전히 가라앉지 않는다고. 일흔은 누구에게나 몸의 많은 부분을 관리하며 지내야 할 때이니까, 아버지가 그렇게 오래오래 건강히 내 곁에 남아주었으면 좋겠다. 아직 내게는 아버지에게 묻고 싶고 찾고 싶은 생의 질문들이 많으니까. 그것은 나무 하는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얘기일 테니까.
김금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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