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으레 승리 서사에 주목하기 쉬워서 임진왜란(1592~98) 하면 흔히 3대첩(진주성전투, 한산대첩, 행주성전투)을 떠올리지만, 앞선 패배의 양상들이 이어질 전투의 기운을 돋운 바도 기억해야 한다. 임란의 사실상 첫 전투였던 동래성 전투가 그 예였다.
일본 전국을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청)침략군 선발대 1만8,000여명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병선 700여척에 분승해 1592년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3일) 부산(동래부) 영도에 상륙했다. 병력은 둘로 나뉘어 각각 다대포와 부산진성 공략에 나섰고, 활과 화살로 무장한 800여명의 농성군은 각각 10배가 넘는 적의 대포와 조총 공격에 반나절 만에 전멸했다. 함께 숨진 성민 등 민간인 규모는 병력의 3배에 달했다.
음력 4월 15일(5월 25일) 동래성 전투는 그러니까 임진왜란의 세 번째 전투지만, 양측이 전열을 갖추고 벌인 사실상 첫 대규모 전투였다. 전시규범인 제승방략(制勝方略)에 따라 경상좌도의 육상 병력이 동래성에 집결했지만, 모두 3,00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절기상 청명(淸明)을 갓 지난 그날의 날씨는 유난히 청명했다고 기록돼 있다.
1년 전 부임한 동래 부사 송상현은 유키나가의 항복 권유에 “戰死易假道難(전사이가도난)’ 즉 ‘싸우다 죽을지언정 길을 내줄 수는 없다’는 답을 목판에 적어 성 밖으로 던졌다. 그 6자의 각오는 사실 임금과 조정을 비롯한 후방의 군인 백성들에게 보라고 내건 결사 항전의 깃발이었다.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일부 피신한 이들을 제외한 병사와 성민 약 5,000명이 학살됐고, 약 500여명이 전시 노역을 위한 피로자(被虜者)로 끌려갔다. 전사 직전 송상현이 남겼다는 “孤城月暈(고성월훈,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로 시작되는 4언절구 한시의 주제 역시 군신의 의리였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진주성을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의 군졸들과 함양, 산청의 선비와 백성들이 결의를 다졌다.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막혀 곡창 전라도를 장악하지 못한 채 겨울을 나게 된 일본군은 육로를 뚫기 위해 11월(음력 10월 6일) 진주성 공략에 나섰다가 병력 3만을 잃고 패배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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