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ㆍ18 광주 커뮤니타스’ 강인철 한신대 교수 인터뷰
1980년 5월 22일 낮 12시 정각. 광주 전남도청 옥상에 나부끼는 태극기에 검은 리본이 달렸다. 지난 닷새 동안 신군부의 총탄에 스러져간 희생자들을 추념하기 위해서였다. 도내 각 병원에서 옮겨진 시신들은 태극기로 둘러졌다. 금남로 일대에 운집한 수만명의 시민들은 일제히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봉창했다. 전날, 똑같은 자리에서도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군의 발포 명령이었다. 이날의 애국가는 오용된 국가 폭력에 맞서 쓰러져간 영령들을 위한 추모의 만가(輓歌)였다.
“5ㆍ18 광주 민주 항쟁 주체들에게 태극기와 애국가는 저항과 애국의 상징이었습니다. 청년들은 태극기 한 장만 움켜쥔 채, 쏟아지는 총탄 속으로 달려갔죠. 태극기의 수요가 폭증하자 동네 아주머니들이 급히 모여 재봉틀로 태극기를 생산해내기도 했어요. 태극기와 애국가는 ‘진짜 애국’(시민)과 ‘가짜 애국’(계엄군)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기 위한 장치였던 거죠.”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맞춰 ‘5ㆍ18 광주 커뮤니타스’를 펴낸 강인철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는 광주항쟁의 정신이 압축된 장면 중 하나로 22일 처음으로 치러진 시민 추도 의례를 꼽았다. 사회학과 종교학을 가로지르며 ‘시민종교’라는 연구 영역을 개척해온 강 교수는 이번 책에서 1980년 5월18일 아침부터 27일 아침까지 학살과 항쟁, 해방의 단계를 ‘사회 드라마’로 재조명하며 광주 민주화 운동의 의미를 되새긴다.
이메일로 만난 강 교수는 이른바 광주 정신, 오월 정신을 ‘변혁, 연대, 공동체’로 설명했다. 1980년 광주는 변혁과 저항 정신으로 가득했던 시공간이었다. 광주 항쟁에 나섰던 시민들의 최소 목표는 ‘민주화’와 ‘항쟁 정당화’. 광주 시민들은 계엄령 해제, 전두환과 신군부 퇴진, 유신 옹호세력 축출, 민주정부 수립 등을 외치며 항쟁의 정의로움과 불가피성을 몸소 증명했다.
광주 시민들은 항쟁 기간 공동체를 위해 자기 희생도 마다하지 않으며 연대하고 헌신했다. 시장 상인들과 주부들은 시민군에게 나눠줄 주먹밥을 만들었고, 길거리마다 ‘밥상공동체’가 펼쳐졌다. 생업을 접은 택시와 버스 트럭 기사들은 차량 시위에 동참하며 힘을 보탰다. 코피가 나도록 심한 악취에도 불구하고, 어린 여고생들까지 나와 시신을 씻기고, 양말을 신겨줬다. 부상자 치료를 도우려는 끝없는 헌혈 운동도 이어졌다. 사람들은 공동선을 위해 재물을 기꺼이 내놓을 뿐 아니라, 타인과 대의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쳤다.
강 교수는 “난무하는 유혈 폭력의 한복판에서 두려움과 분노에 온몸을 떨다 뒤늦게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을 재발견하고, 자각함으로써 마침내 죽음의 공포마저 초월해버린 위대한 시민들의 유대로 만들어진 세상”이었다고 설명했다.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신군부에 맞서 ‘시민 공화주의’도 구현됐다. 계엄군이 도시 밖으로 잠시 퇴각하자, 시민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권력기관(도청)을 개방하고, 민주주의를 위한 핵심적인 공론장 역할을 담당할 광장과 대안 언론을 창출한 것이었다. 관상용 분수대는 시민들의 아고라(agora)로 변신했고,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된 대규모 시민집회에서 고위 관료와 지역유지들이 중심이 된 ‘관변 수습대책위원회’는 여지 없이 탄핵을 당했다. “지위와 계급의 구별이 사라지고, 모두가 참여하고 주권자가 되는 민주적이고 공화적인 세상,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세상”이 광주였다. 이후 1987년 6월 항쟁, 평화적 정권교체, 촛불혁명까지 광주 정신은 한국의 민주화를 성숙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그러나 발포 명령자 등 핵심적인 진상규명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 강 교수는 철저한 진상조사와 함께 광주 정신을 계승하고,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으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광주민주화 운동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는 ‘역진 방지’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미래를 향한 전진을 촉진하는 추동기능도 갖고 있습니다. 40년 전 광주에서 현란하게 펼쳐졌던 평등주의와 휴머니즘의 사회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재현하고 구체화하는 작업이 계속 돼야 하는 이유입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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