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신군부는 민주화 열망이 뜨겁던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계엄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한 18일부터 공수부대가 주축이 된 공수부대는 곤봉을 휘두르며 학생과 시민을 무자비하게 짓밟기 시작했다. 21일 시위대를 향한 계엄군의 집단 발포를 계기로 광주 시민과 학생들은 무장을 하고 시민군을 조직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당시 전남도청과 이어진 금남로 주변에선 산발적인 시가전이 벌어졌고, 도청 앞 분수대 광장으로 매일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모여 민주화의 의지를 다졌다. 시민군의 최후 항전지기도 했던 도청은 계엄군에 의해 함락된 27일 아침 저항의 대가로 죽음을 맞이한 시민군의 주검과 부상자, 생포돼 끌려가는 이들이 뒤엉켜 처참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20년 5월, 무차별적인 탄압과 처절한 저항이 공존하던 광주, 그 거리를 다시 찾았다. 1980년 최루탄 연기와 탄피, 혈흔으로 뒤덮였던 거리와 광장에선 더 없이 평온한 일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미처 수습되지 못한 시신 주위로 계엄군이 활보하던 금남로, 전쟁터를 방불케 한 도청과 분수대 광장, 비극은 사라졌지만 민주화를 꿈꾼 그날의 함성만은 가슴 속 어딘가에서 메아리 쳤다. 40년의 간극을 넘어 1980년과 2020년 광주, 그 거리를 모습을 사진으로 비교해 보았다.
◇전남도청 앞 광장
전남도청에서 바라본 분수대 광장. 1980년 광주로 파견된 한국일보 기자가 촬영한흑백 사진 속에서 분수대 주변에 운집한 군중들이 보인다. 분수대엔 훼손이 심각해 신원 확인조차 불가능한 시신이 관에 들린 채 놓여 있다. 2020년 5월 12일 5ㆍ18광주민주화운동 40주기를 앞둔 분수대 광장은 역사의 비극을 평온 속에 가둔 듯 고요하다.
◇금남로
40년 전 금남로는 격렬한 시위가 끊이지 않았던 장소다. 거의 매일 최루탄과 화염병이 빗발쳤고 공수부대의 폭력진압에 시위대는 속절없이 쓰러져 갔다. 1980년 5월 20일 검은 연기가 피어나는 금남로에서 계엄군이 젊은이를 체포해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다. 축 처진 어깨를 계엄군에 붙들린 채 끌려가는 청년의 모습이 측은한 금남로를 2020년 5월 13일 다시 찾았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던 40년 전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상무관
1980년 당시 상무관에는 희생자들의 시신이 임시 안치됐다. 옥상과 지붕까지 올라가 상황을 주시하던 시민들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 오히려 찾는 이 없어 내리 깔린 적막감만 건물 주위를 휩싸고 있다. .
◇적십자병원
5월 21일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발포 이후 부상자들이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몰렸다. '병원에 피가 모자라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이 너도나도 병원을 찾아 헌혈을 한 곳이다. 적십자병원은 1995년부터 서남대 의대 병원으로 바뀌었었으나 대학 재단의 비리 후유증, 경영난 등을 겪으면서 2018년 폐교 절차를 밟으면서 방치됐다. 최근 민간 매각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진 이 건물 주변에는 ‘5·18 사적지(11호)를 보존해야 한다’는 플래카드도 걸렸다.
민주화를 갈망하던 무고한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힘없이 쓰러져 간지 40년이 흘렀다. 아직까지도 발포 명령권자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지만, 17일 문재인 대통령은 “여전히 발포 명령자가 누구였는지, 발포에 대한 법적인 최종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이런 부분들은 밝혀지지 않았다”며 대표적인 과제로 최종 발포 명령권자를 규명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꼽겠다고 밝혔다. 오월 영령의 한이 풀릴 날이 다가오고 있다.
광주=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