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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세상 제일 부러운 일들

입력
2020.05.16 04: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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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마스크를 쓴 아이들이 아파트 정원 산책로를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내달렸다. 인라인스케이트를 볼 때마다 조건반사처럼 떠오르는 오래된 에피소드가 있다.

“엄마,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싶어요. 혹시 사주실 수 있을까요?” 유치원에 들어간 지 며칠 안 된 큰아이가 떠보듯 제 엄마에게 물었다고 한다. 강단 있는 나의 막내동생이 딸애의 유혹에 호락호락 넘어갈 리 만무했다. “안 돼.” 5년 인생을 맏이로 살아 내며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스스로 터득한 아이는 엄마의 한마디에 쿨하게 물러났다. 그 무렵 남편의 월급만으로 영유아 단계 세 아이를 키워야 했던 내 막내동생은 영어와 피아노 대신 절제와 양보의 미덕을 조기교육하는 데 올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화수분 같은 곳간 물려줄 거 아니라면 제 욕망 통제하는 습관이 제2의 본능처럼 작동하도록 키우는 게 낫다고 봐.” 가난한 부모의 알리바이치고는 참 구차한 변명이라고 생각했지만, 교육학을 전공한 동생에게 나는 토를 달지 않았다.

한데 두어 달 지나서 사달이 났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딸애가 완강한 말로 엄마에게 요구했다. “엄마, 제발 인라인스케이트 좀 사주세요.” 돌연한 변화에는 필시 동기가 있을 터였다. 사연인즉 다음날 유치원에서 체육대회가 열리는데 인라인스케이트가 주종목으로 포함된 거였다. 그 돈이면 온 가족이 읽을 책을 열 권이나 살 수 있다고 설득했지만 아이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흐느끼며 또다시 제 목소리를 냈다. “책은 도서관에 가서 빌려 볼게요. 새 옷도 필요 없고요. 제발 인라인스케이트 사주세요.” 마침 퇴근해서 식탁에 앉았던 아빠가 딸아이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아내의 교육 방식을 묵묵히 따르기만 하던 그가 옆길로 샌 건 그날이 처음이라고 했다. “가자, 우리 큰딸. 아빠 용돈 털어서 스케이트 사줄게.”

문 닫기 직전 슈퍼에 들어가 세일 상품으로 나온 구형 인라인스케이트를 산 그 밤, 아빠와 함께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간 아이는 비틀비틀 걷고 바퀴를 굴려 속도 올리는 법을 속성으로 배웠다. 다음날, 아침을 먹은 아이가 부모와 동생들을 불러 모은 뒤 오래도록 회자될 일성을 남겼다. “모두 와서 지켜보세요. 저는 오늘 가족의 명예를 걸고 인라인을 탈 거예요.”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을까?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설사 두어 달 먼저 스케이트를 신었다고 쳐도, 가족의 명예를 걸고 출발선을 튀어나가는 친구를 따라잡을 여섯 살짜리는 없었을 것이다. 전화기를 통해 짠내 나는 조카의 무용담을 듣던 그 저녁, 정신 못 차리고 웃던 나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애틋함을 어쩌지 못해 눈가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었다.

지난 연휴 고향집에 가니 막내네 다섯 식구가 먼저 와 있었다. 어느새 중고등학생이 된 세 아이는 제 엄마의 교육철학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로 작심이라도 한 듯 반듯하고 총명하게 청소년기를 통과하고 있다. 그 이틀 동안 어른들 무리에 섞여 조용히 텃밭 일하고, 설거지하고, 청소기를 돌리는 그 집 3남매를 지켜본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한량없는 애정을 담아 동생을 바라보았다. “거 참, 신통하네. 우리 막내가 자식 교육 하나는 틀림없이 해내는 거 같어.” 조카들이 제 손으로 밥 차려 먹을 나이가 되자 밥벌이 현장으로 다시 뛰어든 동생이 의뭉스럽게 웃었다. “궁핍이 가장 좋은 교사라는 거, 8남매 키워 낸 아버지가 더 잘 알잖어유. 하아, 근데 어짜나.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쟤네들이 풍요에 길들여지는 기미가 역력해서, 아버지 나는 요즘 그게 한걱정이여유.” 우하하하! 이래저래 동생이 부러워진 나는 여든일곱 아버지와 마흔다섯 막내딸이 만담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거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어대기만 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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