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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 40주년] “피로 물든 그날의 광주… 40년이 지나도 숨가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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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 40주년] “피로 물든 그날의 광주… 40년이 지나도 숨가쁘다”

입력
2020.05.16 04: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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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일보 기자로 현장 취재했던 조성호씨와 돌아본 광주

애국가 신호로 도청 앞 집단발포, 전일빌딩엔 헬기사격 탄흔 오롯이

주남마을엔 민간인 학살 상처… “발포 명령자·암매장 의혹 밝혀져야”

[저작권 한국일보] 1980년 광주항쟁을 현장에서 취재한 조성호 전 한국일보 전국부장이 12일 광주 동구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빌딩245'에 올라 구 도청을 바라보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광주=서재훈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1980년 광주항쟁을 현장에서 취재한 조성호 전 한국일보 전국부장이 12일 광주 동구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빌딩245'에 올라 구 도청을 바라보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광주=서재훈 기자

“계엄군과 시위 군중의 숨막히는 가두 공방, 총성과 피로 물든 금남로, 시신들이 즐비한 상무실에 넘쳐나는 통곡과 비명, 총알이 머리 곁을 스쳐갔던 위기의 순간…불지옥 같은 광경이 아직까지 환영처럼 떠오른다.”

5ㆍ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앞서 12일 광주를 찾은 조성호(76) 전 한국일보 전국부장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를 기억하면 숨이 가빠진다고 했다. 당시 사회부 기자로 현장에 급파돼 5ㆍ18 다음 날부터 열흘 동안 목도했던 역사를 그는 “민주화 운동이 아닌 항쟁이었다”고 기억했다.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40년 전 광주의 현장을 떨칠 수 없는 노(老)기자는 “민주화 운동과 항쟁의 논란뿐 아니라 숱한 시민을 사살한 발포 명령자나 민간인 학살의 정확한 규모도 규명되지 않았다”며 “40년이 지나도록 5ㆍ18은 현재 진행형”이라고 말했다.

19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인 5ㆍ18이 올해로 40주년을 맞고 있지만 실체적 진실은 아직 다 규명되지 않았다. 두 전직 대통령이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고 5·18특별법을 통해 진상을 규명하는 노력이 진행됐지만, 160여명을 죽음으로 내몬 발포 명령자는 여전히 미궁이고 무차별 학살과 암매장 소문이 무성한데도 300여명(피해자단체 주장)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최근 옛 광주교도소에서 신원미상의 시신 261구가 발견되면서 행방불명자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5ㆍ18 40년을 맞아 당시 불지옥 같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했던 조성호 전 한국일보 기자와 함께 광주를 다시 찾아 아직도 풀리지 않은 문제들을 추적했다.

◇시민 향한 집단발포 ‘피의 초파일’, 책임자는 미궁

조 전 부장과 함께 먼저 찾은 곳은 5ㆍ18의 상징적 장소가 된 전일빌딩. 전남도청과 금남로 광장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빌딩은 시민군과 계엄군이 격렬히 대치했던 곳으로 계엄군의 기총소사를 집중적으로 받기도 했다. 5ㆍ18 40주년을 앞두고 최근 리모델링을 마친 건물은 과거의 아픈 상처를 다 치유한 듯 보였다. 하지만 퇴역기자는 “기총소사를 포함한 발포 명령자를 밝히지 않고는 전일빌딩이 새로 태어나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전일빌딩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청과 광장은 40년 전 ‘피의 초파일’로 불리는 5월 21일 시민군과 계엄군의 최대 혈전이 벌어졌던 역사의 장소. ‘간밤에 공수부대의 총격에 숨진 시신 2구가 발견되자 시민들은 맨발의 시신에 태극기를 덮고 리어카에 옮긴 뒤 금남로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분노한 군중이 구름처럼 몰렸고 20만명 넘는 시위대가 외치는 함성은 하늘을 찔렀다. 오후 12시 50분 시민군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탈취해 온 장갑차 한 대가 돌연 공수부대 저지선을 향해 돌진했고, 웃옷을 벗은 청년이 태극기를 번쩍 들고 장갑차 바깥으로 튀어 오르는 순간 총성과 함께 청년은 피를 뿜으면서 쓰러졌다. 그러자 오후 1시쯤 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리면서 요란한 총성이 다발로 터지며 아수라장이 됐다.’ 조 전 부장은 당시 상황을 눈 앞에서 보는 것처럼 설명하면서 “애국가는 시민군을 향한 집단발포의 신호였던 것 같다”고 했다. 당시 금남로에 몰려든 시민을 향한 발포로 54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저작권 한국일보]조성호 전 한국일보 노조위원장이 12일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빌딩245'에 올라 취재 당시 자신이 직접 그렸던 광주시 지도를 살펴보고 있다. 광주=서재훈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조성호 전 한국일보 노조위원장이 12일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빌딩245'에 올라 취재 당시 자신이 직접 그렸던 광주시 지도를 살펴보고 있다. 광주=서재훈 기자

광주 시민을 향한 집단 발포 책임을 둘러싼 논란은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40년이 지나긴 했지만 현장과 당시 목격자들은 신군부와 그 책임자를 지목하고 있지만 당시 집권세력은 여전히 “폭동을 일으킨 시민군이 먼저 총격을 가한 상황에서 처해진 자위적인 대처”라고 주장한다. 당시 신군부의 최고 실력자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 또한 발포 명령을 여태 부인하고 있다. 당시 11공수여단과 7공수여단의 전투상보에도 ‘계엄군의 집단 발포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신군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현장은 누구의 책임인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조 전 부장과 함께 찾은 전일빌딩 10층에는 헬기 총격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총탄이 위에서 아래로 발사된 흔적에 비춰보면 헬기에서 발사된 기총소사가 분명했다. 조 전 부장은 “집단 발포가 터진 5월 21일 현장을 지휘한 전교사령관과 31사단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왔던 공수부대 지휘관들도 모두 발포 명령을 부인했다”며 “광주시민들과 많은 국민들의 시선이 향하는 ‘그 사람’의 입을 반드시 열고 최초 발포 명령자 이름을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보다 명시적으로 발포 명령자를 지목했다. 5ㆍ18의 최초 기록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공동 집필자인 이재의 5ㆍ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원은 "당시 군 기록을 보면 보안사령부에 하루에도 수차례 광주 상황이 올라갔고, 전두환의 판단과 지시에 의해 육군이 움직였다"라며 "결국 전두환이 직접 발포 명령을 내렸거나 이를 강력히 암시했을 가능성이 높게 제기된다"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12일 광주광역시 동구에 위치한 주남마을에 건립되어 있는 위령비. 광주=서재훈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12일 광주광역시 동구에 위치한 주남마을에 건립되어 있는 위령비. 광주=서재훈 기자

◇광주교도소의 집단 유골, 커지는 행불자 암매장 의혹

5월 21일 도청 혈전에서 밀린 계엄군은 외곽으로 주둔지를 옮긴 뒤 ‘광주봉쇄작전’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시 경계에서 주둔하면서 광주 밖으로 나가려는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광주 동구 월남동, 남구 송암동 진월동 등에서 이 때 민간인 피해자가 속출했다. 주남마을을 함께 둘러본 조 전 부장은 “계엄군이 무차별 학살한 민간인을 암매장하면서 정확한 피해 집계가 어렵게 됐고 행방불명자 통계도 제각각이 됐다”고 했다.

월남동 주남마을은 광주에서 화순으로 나가는 길목이라 피해가 컸다. 계엄군은 주남마을 인근에 주둔하면서 통행을 차단했다. 대규모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것은 23일 오전. 매복하고 있던 계엄군은 화순으로 향하던 미니버스를 발견하자마자 차량에 총격을 가했고, 차량에 타고 있던 18명의 시민 중 17명이 사망했다. 당시 목격자들에 따르면 계엄군은 2명의 부상자마저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총살한 뒤 암매장했다. 주남마을 주민들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5월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마을 주민 이철성(74)씨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당시 군인들이 바스락 소리만 나도 총질을 해대는 바람에 집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며 “월남전이나 6ㆍ25 전쟁에서도 민간인은 보호했다는데 계엄군은 잔인했다”고 말했다.

민간인 학살과 암매장 의혹은 지난해 12월 옛 광주교도소에서 신원미상의 유골 261구가 발견되면서 더욱 증폭되고 있다. 정부 당국이 5ㆍ18 행방불명자와의 연관성 조사에 착수하자, 17가족이 혈액형 체취 등 관련 절차를 받겠다고 신청했다.

40년이 지나도록 피해자 집계가 들쭉날쭉인 점도 문제다. 계엄사는 5ㆍ18 직후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170명 등이 사망했으며 총 380명이 다쳤다”고 발표했으나 5ㆍ18을 현장에서 경험했던 선교사 피터슨 목사는 사망자 수를 800여명이라고 추정했다. 광주시가 2015년 집계한 피해자 규모는 당시 사망자 161명, 행방불명자 78명, 부상 후 사망자 113명이지만 5ㆍ18기념재단이 2005년 기준으로 집계한 피해자는 당시 사망자 165명, 행방불명자 65명, 부상 후 사망 추정자 376명이다.

[저작권 한국일보]조성호 전 한국일보 위원장이 12일 광주광역시 북구에 위치한 국립 5ㆍ18민주묘지을 찾아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광주=서재훈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조성호 전 한국일보 위원장이 12일 광주광역시 북구에 위치한 국립 5ㆍ18민주묘지을 찾아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광주=서재훈 기자

◇ “40년 지났는데 아직도 아들이 안 돌아와”

행방불명자에 대한 아픈 기억은 무등산 자락에 위치한 국립 5ㆍ18민주묘지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직도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무명열사의 묘’는 모두 5기. 5ㆍ18 당시 실종자에 대한 신고는 448건이지만, 이중 행방불명을 인정받은 사람은 78명에 그친다. 민주묘지를 함께 찾은 조 전 부장은 “공수부대원들은 처음부터 사상자 수를 은폐하기 위해 사상자를 트럭에 실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 파묻었다”고 증언했다. 일부에서는 헬기로 시신을 옮겼다는 증언도 없지 않다.

5ㆍ18 당시 부모 자식을 잃고 흔적조차 찾지 못한 행불자 가족들은 아직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5ㆍ18 행방불명자 가족 차초강(81)씨는 죽기 전 아들의 시신을 찾는 게 소원이다. 5ㆍ18 전날 19세의 아들(이재몽)은 “시장에 마늘을 팔러 간다”는 말을 하고 나간 뒤 40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고 한다. 차씨는 “40년 동안 기다리면서 포기도 많이 하고, 실망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다”며 “사실 꼭 찾을 수 있을 거란 희망도 없지만 죽기 전에 내 아들 내 손으로 묻어주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행불자를 찾는 일은 더욱 어려워졌다. 손미순 전 5ㆍ18 행방불명자가족회 사무처장은 “당시 상황을 알고 있는 계엄군이나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 얼굴을 가려도 좋다. 하지만 진실을 알려달라”고 호소했다. 이들은 옛 광주교도소 부지에서 발견된 신원미상의 유골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다.

5·18 피해자로 인정 받은 보상자
5·18 피해자로 인정 받은 보상자

광주 시민들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5ㆍ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위원회를 진상을 밝힐 마지막 기회라고 보고 거는 기대가 크다. 사건이 발생한 지 40년이나 지나면서 책임져야 할 관련자들 상당 수가 이미 숨지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조바심도 크다. 진상규명위는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게 된 경위와 발포 관련 지휘체계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과 관련한 진실 규명 및 가해자 특정 △행방불명자 조사 및 암매장과 사체유기 가능성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의혹 등을 집중 조사할 방침이다. 이재의 5ㆍ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원은 “국회에서 법으로 만든 공식적인 첫 규명위원회인 만큼 조사한 내용을 충실하게 역사적으로 기록해 국가 보고서로 채택하길 기대한다”면서 “특히 발포자 책임 문제와 암매장 피해 문제는 꼭 해결돼 5ㆍ18 관련 논란이 이제는 해소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광주=안하늘 기자 ahn70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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