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법규 미비로 제정 10년째 차일피일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인 베트남이 시위 급증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달리 경제적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베트남 정부는 한국식 ‘집회와시위에관한법률(집시법)’을 참고해 이를 통제할 계획이지만, 집시법과 호응해야 할 다른 법제가 없어 차일피일 제정 일정을 미루고 있다.
14일 베트남 법조계와 VN익스프레스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응우옌쑤언푹 총리는 전날 “집시법 초안의 국회 제출 시기를 늦춰달라”는 공안부의 요청을 승인했다. 초안의 구체적 적용 요건과 처벌 조건에 대한 검토가 미비하다는 이유에서다. 정부 결정으로 20일 예정된 국회 상임위원회 법안 제출 시한은 무기한 연기됐다. 2011년 집시법 초안 작성에 들어간 점을 감안하면 10년째 관련 법조문조차 완성하지 못한 셈이다.
통상 집시법 같은 통제 조치를 법제화하면 저항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때문에 베트남 정부의 행보를 심사숙고하는 모양새로 볼 수 있지만, 현지 법조계에선 부족한 자국 법체제가 집시법 제정 연기의 근본 원인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집시법을 효과적으로 발동하기 위해선 행위 유형에 따른 처벌이 구체적으로 연동되는 형법이 완성돼야 한다. 무기 및 폭발물 관리법 등 관련 법규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베트남에는 아직 이런 법조항이 전무한 실정이다. 하노이의 외국계 로펌 관계자는 “갈수록 수위가 높아지는 시위 때문에 베트남 정부의 집시법 제정 의지는 상당하나 상응하는 법 조항이 없어 집시법이 나오기까지 앞으로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트남 정부는 미비한 법 체제를 보강하기 위해 한국 사법부에 도움을 요청할 계획이다. 앞서 베트남 법무부와 공안부는 한국 집시법을 뼈대로 삼고, 러시아ㆍ중국ㆍ태국의 관련 법제를 비교ㆍ분석하는 방식으로 집시법 제정 작업을 벌여왔다. 한국 법원 관계자는 “최근 집시법과 연동되는 법 조문 자료를 달라는 베트남 정부의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며 “경제 활동의 자유도를 더 높이면서 정치적 안정성도 원하다 보니 여러 지점에서 법 논리가 상충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베트남의 집회ㆍ시위 경향은 정부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실제 2018년 호찌민 다낭 하노이 등 대도시 토지소유자들은 외국 기업의 베트남 경제특구(SEZ) 토지 이용 권한을 기존 70년에서 99년까지 연장하는 법안 제정에 반발하며 집단 행동에 나섰다. 당시 정부는 집시법이 없어 건축물 파손 및 공무집행 방해죄 등만 적용해 이들을 처벌했다. 지금도 베트남 각 지방정부 청사 앞에선 정부의 대대적인 사회간접자본(SOC) 사업과 관련된 토지 수용에 반대하는 지주들의 시위가 거의 매일 이어지지만, 마땅한 처벌 조항이 없어 당국이 강제 해산에 애를 먹고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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