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단어를 잘 외워도 외국어를 쉽게 습득하기 어려운 큰 이유는 어순이 다를 경우다. 게다가 그 말에 변화가 많으면 웬만큼 노력해도 숙달된 경지에 이르기 쉽지 않다. 명사마다 고유의 성(性)이 부여돼 표기나 관사가 달라지는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인도유럽어족의 여러 언어를 배울 때 한국인이 늘 겪는 어려움이다. 영어에는 관사가 ‘a’ ‘the’ 두 가지뿐이지만 프랑스어에는 단수형만도 남성형이 3개(un, le, du), 여성형이 또 3개(une, la, de la)다.
□명사에 성 구분을 한 원조는 문법학을 개척한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라고 하지만 지금 유럽 여러 언어의 명사 성 구분에 직접 영향을 준 것은 라틴어다. 라틴어는 중성까지 포함해 명사를 3개 성으로 구별했으나 이를 계승한 현대 로망스어군(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에서 중성은 사라지고 남녀 구분만 남았다. 애초 이런 구분은 다분히 문법적인 것이어서 남녀와 직접 상관 없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프랑스어가 서서히 라틴어를 대체해 지배계급 언어가 되는 과정에서 남성이 문법 다듬기를 주도한 뒤로 남성 명사가 눈에 띄게 늘었다는 점이다.
□이런 작업을 상징하는 기관이 17세기 프랑스어 보호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아카데미 프랑세즈다. 현대 들어 단어의 성 차별을 없애자는 움직임이 일면서 프랑스에서도 관련 캠페인이 이어졌으나 이에 반기를 들어 자주 구설에 오르는 것도 40명 종신 회원으로 구성된 이 기관이다. 2014년 당시 한 남성 의원이 여성 국회의장에게 남성형 호칭(president)에 ‘마담(Madame)’만 붙여서 불러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여성형(presidente)을 사용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어야 하는 규정까지 무시한 행동인데도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그 남성 의원의 표현을 옹호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을 뜻하는 ‘Covid-19’를 여성 명사로 정해 비난이 일고 있다. 질병을 뜻하는 ‘말라디(maladie)’가 여성 명사라는 이유지만 비루스(virus)와 같은 맥락이라며 이미 이를 남성 명사로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굳이 바꿀 이유가 있었을까 싶다. 이런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두고 한 프랑스 여교사는 “온갖 천재지변 명사들을 여성으로 규정해 뼛속까지 여성 차별적”이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코로나 성별 논란이 새삼 성 차별 언어 습관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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