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못 벌어도 기분이 좋아요. 제 영화가 31년 만에 빛을 보다니요!”
목소리는 들떴고, 얼굴엔 웃음이 넘쳤다. 1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를 찾은 김태영 감독은 남부럽지 않은 듯 행복감에 젖었다. 그럴 만도 했다. 1989년 상영 불가 처분을 받은 자신의 영화 ‘황무지’가 31년 만에 극장에서 상영된다. ‘황무지’는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첫 장편영화다. 그런 영화가 5ㆍ18 40주년을 맞아 23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스크린에 명멸하게 됐으니 감회에 젖을 만했다.
‘황무지’는 태어나자마자 유폐된 영화다. 1989년 5월 5일 이 영화가 첫 상영된 광주 소극장 드라마스튜디오에 영화사 우진필름 직원들이 들이닥쳐 필름을 압수해갔다. 우진필름은 ‘황무지’의 제작비 3,400만원 중 1,400만원을 댄 투자사였다. 김 감독은 굴하지 않았다. 비디오테이프에 옮겨 놓은 영화를 같은 달 9일 서울 혜화동 예술공간 금강에서 상영했다. 이번엔 문화공보부 직원들이 테이프를 압수해갔다. “비디오로 대중 상영을 하면 불법”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김 감독은 “영화 내용 때문에 우진필름과 문공부가 각기 나선 거”라고 봤다. “5ㆍ18 가해자를 직설적으로 공박하는 내용이 정권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황무지’는 30여년이 지난 지금 봐도 파격적이다. 1980년 5ㆍ18 진압군이었던 공수부대원 김의기(조선묵)가 주인공이다. 광주에서 상관 명령에 따라 죄없는 소녀를 사살했던 의기는 기지촌에서 고뇌하며 지낸다. 그는 미군의 폭압적인 행태를 보며 심경 변화를 겪는다. “양심을 따르라”는 신부의 조언을 듣고 광주 망월동 묘역으로 향한다. 의기는 양심선언이 담긴 전단을 뿌린 후 분신하며 “깨어나자 병사여, 깨어나자 민주주의여”를 외친다. 영화는 한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박정희 어디 갔어? (전)두환이 안 무서워”라고 외치기도 한다. 기지촌 여성을 유린하는 미군 병사 둘의 이름을 로널드와 라이건으로 설정한 점도 흥미롭다. 5ㆍ18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에서 따왔다. 김 감독은 “라이건은 거짓말(Lie)과 총(Gun)을 합친 말”이라고 했다. “제가 그때 겁도 없이 영화를 만들었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일을 당할 수 있었을까) 무섭기도 해요.”
김 감독은 고교 졸업 후 숙명여대 앞 다방에서 DJ로 일했다. 80년 5월 머리채를 잡고 여학생들을 끌고 가는 경찰들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서울역에서 버스가 불타오는 대형 시위를 보고 한국사회 현실에 대해 각성했다. 대학 진학을 결심했고, 서울예대 방송연예과에 입학했다. 판금 도서만 찾아보다 황석영 작가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고 5ㆍ18의 실상을 접했다.
김 감독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5ㆍ18 유혈 진압 3일 후 광주의 실상을 알리겠다며 건물 6층에서 계엄군 장갑차 위로 투신한 김의기 열사 사연도 마음을 휘저었다. “돌멩이 던지는 일 같은 거 못하던” 김 감독이 광주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들이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냐 고민했어요. 국민 한 사람으로서 영화로 광주 이야기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엔 ‘관찰노트’라는 단편영화를 만들어 5ㆍ18을 거론했다. 배우 최민수가 첫 출연한 영화다. ‘관찰노트’ 필름은 택시에 놓고 내리면서 분실했다. ‘칸트씨의 발표회’라는 단편영화를 만들어 5ㆍ18 문제를 다시 다뤘다. 5ㆍ18 때 시민군 독려 방송을 했다가 가슴이 잘린 채 숨진 누나를 둔, 젊은 남자 칸트(조선묵)가 주인공이다. 이 영화의 끝에는 80년대 운동권 가요 ‘타는 목마름으로’가 나온다. 김 감독은 “타는 목마름으로 만든 영화가 ‘칸트씨의 발표회’였다”며 “피해자를 그린 영화를 연출했으니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한 ‘황무지’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국내 단편영화로는 베를린영화제에 첫 초청된 ‘칸트씨의 발표회’ 역시 23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상영된다.
김 감독은 “동두천과 의정부에서 낮에 촬영하다 밤이면 서울 와서 지인에게 20만원, 30만원 빌려서” ‘황무지’를 완성했다. ‘황무지’는 그에게 영광 대신 빚을 안겼지만 “멋있는” 추억으로 기억된다. “아직도 (진압)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병사들이 있으면 단체로 알을 깨고 나왔으면 좋겠어요. ‘야, 31년 전에 이런 영화도 있었는데, 우리도 고백하자, 양심선언하자’ 그런 움직임 말이에요. 그럼 국민 화합도 빨라지지 않을까요.”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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