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52)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50) 현대차그룹 부회장의 13일 회동은 철저히 비공개로 이뤄졌다. 하지만 국내 1,2위 그룹의 총수이자 오너가(家) 3세 경영자인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사업을 논의했다는 사실로도 재계의 관심은 특별했다. 특히 경쟁과 긴장으로 점철됐던 두 재벌의 관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비상 시국에 성사된 이번 회동을 계기로 협력과 공생으로 급선회할지 주목된다.
회동은 이날 오전 10시 정 부회장이 알버트 비어만 연구개발본부장(사장), 서보신 생산품질담당 사장 등 현대차그룹 임원들을 대동하고 충남 천안의 삼성SDI 배터리 사업장을 방문하며 이뤄졌다. 삼성에선 이 부회장과 전영현 삼성SDI 사장, 황성우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장(사장)이 이들을 맞았다.
삼성 측은 차세대 전기차용 배터리인 전고체(全固體) 배터리 개발 현황을 현대차 경영진에게 브리핑하고 리튬이온 배터리 생산라인을 직접 둘러보도록 안내했다. 일정은 정 부회장 일행이 오후 1시쯤 사업장을 떠날 때까지 3시간가량 진행됐다. 양측 경영진은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도 같이했다.
삼성과 현대차는 이날 경영진 간 논의 사항에 대해선 함구했다. 다만 현대차 관계자는 “배터리 신기술을 청취하는 차원에서 마련된 자리로, 구체적 계약이나 협업 문제가 다뤄지진 않았다”고 말했다. 삼성 관계자는 “완성차업체라는 갑(甲)과 배터리 공급사라는 을(乙)이 만난 자리”라며 말을 아꼈다.
업계에선 전기차 라인업의 적극적 확장을 추진 중인 현대차그룹이 고성능 배터리의 원활한 수급 차원에서 전고체 배터리 분야에서 가장 앞선 기술을 보유한 삼성과 교류한 것으로 보고 있다. 2025년쯤 양산이 시작될 걸로 전망되는 전고체 배터리는 내부 전해질을 액체에서 고체로 대체한 전지로, 현재 전기차 배터리의 주종을 이루는 리튬이온 전지에 비해 충전용량과 안전성이 뛰어나다.
이 부회장과 정 부회장의 만남은 우리 산업계의 ‘영원한 라이벌’로 꼽히는 삼성-현대 기업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사건이다. 두 그룹의 사업 영역이 대거 겹치면서 갈등이 증폭된 80, 90년대를 지나 주력산업이 뚜렷이 나뉜 후에도 삼성과 현대차의 긴장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두 총수의 이번 회동을 두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두 기업에게 국내 경쟁구도가 더 이상 무의미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더구나 그룹 경영 전반에 나선 지 오래지 않은 이들 젊은 총수 입장에선 코로나19 여파를 극복하고 새로운 경영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이 부회장의 경우 지난 6일 과거 그룹 경영권 승계나 노사 관계에서 발생한 불법행위를 공개 사과하면서 “위기는 항상 우리 옆에 있고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며 “끊임없는 혁신과 기술력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면서도 신사업에 과감하게 도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두 총수의 개인적 친분 또한 사업 협력 모색의 디딤돌이 됐다는 관측도 나온다. 두 살 터울인 두 사람은 사석에서 호형호제 하는 사이다. 정 부회장은 이 부회장이 수감 생활을 할 때 면회를 가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선대의 경쟁의식에서 벗어나 실리를 중시하는 두 사람의 공통 성향이 이번 회동을 가능하게 했다는 분석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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