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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취향] 나폴레옹엔 백마가 있었다면, 이성계엔 여덟 준마가 있었다

입력
2020.05.16 04: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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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왕실이라 하면 치열한 궁중암투만 떠올리시나요. 조선의 왕과 왕비 등도 여러분처럼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한 곳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소개합니다. 

 <18> 태조의 여덟 준마 

함남 영흥 본궁 준원전에 있던 태조 이성계 어진 전경을 찍은 일제시대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함남 영흥 본궁 준원전에 있던 태조 이성계 어진 전경을 찍은 일제시대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다비드(Jacques-Louis David)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백마를 타고 알프스 너머를 가리키며 군대를 이끄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앞 다리를 들고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말의 모습은 나폴레옹의 영웅적 면모를 더욱 강조한다. 나폴레옹의 그림처럼 말을 탄 군주의 모습은 군주의 권력을 과시하는 상징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고대로부터 말을 권력자, 특히 천자(天子)와 연관 짓는 관념은 동서양에 공히 나타났다. 특히 중국에서는 왕조 교체기에 창업주를 도와 활약한 말이 건국의 중요한 상징으로 종종 등장했다. 은(殷)나라의 주(紂)왕을 제압하고 주(周)나라를 세운 무(武)왕, 아버지를 도와 당(唐)나라 건국에 무공을 세운 태종(太宗)의 활약 속에 등장하는 말은 그 전형이다. 여기서 말은 주인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난세를 평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데 공적을 세운 존재들로 묘사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재세 1335~1408년, 재위 1392~1398년)는 고려 말의 뛰어난 무장이었다. 공민왕을 도와 원(元) 세력을 축출하는데 일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혼란 속에 흥기하였던 홍건적과 여진, 왜구의 침입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난세의 혼란에 혁혁한 승리를 쌓아간 실질적인 영웅이었다. 그가 승리를 일궈낸 전장을 함께 누빈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그의 말들이었다.

이성계의 말들은 흔히 ‘팔준(八駿)’으로 알려져 있다. 횡운골(橫雲鶻), 유린청(遊麟靑), 추풍오(追風鳥), 발전자(發電緒), 용등자(龍騰紫), 응상백(凝霜白), 사자황(獅子賞), 현표(玄約) 라는 이름의 여덟 마리 말이 바로 그것이다.

태조 잠저인 함흥본궁에 유품으로 전해져 내려온 태조의 활과 화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태조 잠저인 함흥본궁에 유품으로 전해져 내려온 태조의 활과 화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왕조 창업의 역사를 칭송하여 기록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태조의 말에 대한 내용을 처음 확인할 수 있다. 용비어천가 제69장은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것을 당 태종의 업적에 빗대 칭송하였는데, 태종에게 ‘여섯 마리 준마’(六駿)가 있었다면, 태조에게는 여덟 마리의 준마가 있어 창업의 위업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태조가 탔던 말을 곧 조선 왕조 건국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문법이 만들어졌다.

용비어천가 30장에도 태조의 말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청년 태조가 장단(長湍)에서 사냥을 할 때 ‘오명적마(五明赤馬)’를 타고 높은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고개 아래는 낭떠러지였다. 이때 갑자기 노루 두 마리가 튀어나와 달아나자 태조는 말을 달려 노루를 쫓아갔다. 기어코 화살을 명중시켜 노루를 쓰러트리고는 급히 말머리를 돌려 멈췄는데, 절벽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거리였다. 사람들이 기예에 가까운 태조의 솜씨에 탄복하자, 태조가 웃으며 “내가 아니면 멈출 수 없다”고 자부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임금이 될 사람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재로 활용되었는데, 여기에 등장한 ‘오명적마’가 팔준의 하나인 ‘발전자’다. 오명적마는 코와 네 발이 모두 흰 붉은 색 말을 의미하는데, 그 모습이 발전자의 용비어천가 69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모습과 꼭 닮아 있으며, 장단에서 사냥을 할 때 탔다는 기록과도 일치한다.

‘팔준도첩’ 중 발전자의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팔준도첩’ 중 발전자의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446년 세종은 용비어천가의 팔준에 대한 내용을 보고는 이를 그림으로도 그려 건국의 자취를 남길 수 있도록 하였다.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안견(安堅)이 태조의 여덟 마리 말을 그렸으며, 집현전 학사들은 찬문(撰文)을 붙였다. 이듬해인 1447년에는 관료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 시험에서도 팔준도를 제목으로 하는 글을 짓도록 했는데, 성삼문(成三問ㆍ1418~1456년)이 1등으로 뽑히기도 했다.

난세를 평정한 국왕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 국왕이 탔던 말을 그리는 일은 이후 세조(世祖ㆍ재위 1455~1468)와 연산군(燕山君ㆍ재위 1494∼1506)에게로 이어졌다. 세조는 자신이 말을 달리고 활을 쏘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어 삼군(三軍)의 복종을 이끌어낼 수 있었고, 이것이 곧 정난(靖難ㆍ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사건을 이름)의 기초가 되었으니 자신과 함께한 말들을 잊을 수 없다고 하면서 태조의 팔준도를 따라 십이준도(十二駿圖)를 그리게 했다. 연산군도 태조의 팔준, 세조의 십이준을 되새기며 자신의 네 마리 말을 그리도록 했다.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이 취약하였던 세조와 연산군이 태조의 행적과 권위를 빌어 왕업의 명분을 세우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태조의 말들은 왕조 창업의 역사를 칭송하기 위한 상징만은 아니었다. 그의 말들은 실제 태조와 함께 수많은 전장에 나가 몸에 화살을 맞아가며 승리를 일궈냈던 전우였다. 용비어천가를 비롯해 태조의 팔준에 대해 쓴 문헌에는 태조의 말들이 전장에서 맞은 화살 개수가 마치 훈장처럼 기록되어 있다.

횡운골(橫雲鶻)은 태조가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ㆍ?~1388)를 쫓아내고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할 때에 탔다고 하는데 전장에서 화살 두 발을 맞았으며, 유린청(遊麟靑)은 태조가 오녀산성을 차지했을 때와 해주ㆍ운봉 등지에서 왜구를 상대로 승전할 때에 탔던 말로, 역시 세 발의 화살을 맞았다. 추풍오(追風烏)와 용등자(龍騰紫)도 전장에서 각각 화살을 한 발씩 맞았다.

전장에서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며 승리를 태조를 승리로 이끈 말들이었던 만큼 이들의 존재는 각별했다. 그중에서도 유린청은 태조에게 더욱 특별한 말이었다고 전해진다. 태조는 유린청이 여섯 살일 때부터 이 말을 타기 시작해서 서른한 살에 죽을 때까지 25년의 세월을 함께 했다. 1370년 공민왕이 요동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이성계를 출정시켰을 때 함께 한 것도 유린청이었다. 이때 이성계는 화살 70여발을 쏘았는데, 모두 적군의 얼굴에 명중시켜 군사들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 그 결과 오녀산성을 차지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으니, 유린청도 이러한 대승을 옆에서 지켜보았을 것이다. 유린청의 가슴 오른쪽, 왼쪽 목덜미와 오른쪽 볼기에는 전장의 상처가 남아 있었다. 유린청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다고 하며, 석조(石槽)를 만들어 묻어주었다.

‘팔준도첩’ 중 유린청의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팔준도첩’ 중 유린청의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태조는 왕위에 오르고 난 뒤 여덟 마리 중 노령의 말 두 마리는 놓아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는 주나라 무왕이 천하를 평정한 뒤 해산하면서, 무공을 세울 때 동원하였던 말은 화산 남쪽 기슭으로 돌려보내고, 소는 도림(桃林)의 들에 풀어 놓아 다시 쓰지 않을 것을 온 천하에 보였다는 고사를 따른 것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함경도 단천에 있는 목장에서 이때 풀어준 말들의 새끼를 받아 대대로 길러왔으며, 이로 인해 나라 안에서 가장 유명한 말들이 이 목장에서 생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조의 여덟 마리 말의 모습은 숙종(肅宗ㆍ1674~1720년) 대 만든 ‘팔준도첩’을 통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앞서 세종 대 안견이 그린 팔준도는 전란으로 소실되었고, 숙종 대 화공에게 명해 다시 그리도록 하였다. 숙종이 그림에 찬문을 짓기도 했다. “태조대왕께서 나라를 세우실 때의 어려움(艱難ㆍ간난)을 잊지 않고 후대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守成ㆍ수성)의 어려움을 생각하는 마음”을 팔준도를 통해 전하고자 했다고 썼다.

숙종은 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기략’을 편찬하고, 역대 국왕의 글과 글씨를 모아 ‘열성어제’와 ‘열성어필’을 편찬하는 등 왕실 문화의 정비를 통해 왕실의 정통성을 세우는데 힘쓴 왕이다. 특히 창업주 태조의 업적을 재평가하고 그의 자취를 기념하는 일은 왕실의 정통성을 세우는 데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었으며, 창업의 역사를 지키고 계승해 나갈 자기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국왕의 권위, 왕실의 위엄을 강조하고자 할 때 창업주 태조와 그의 팔준도가 효과적인 정치적 상징으로 지속적으로 소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침 국립고궁박물관 ‘숙종대왕 호시절에’ 테마 전시에 숙종 대에 제작된 ‘팔준도첩’을 전시하고 있으니 팔준의 기상을 직접 감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

김재은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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