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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아버지의 ‘머리맡’ 가르침이 그립습니다

입력
2020.05.14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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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소식만 전하자는 어버이날이 권장되니, 부모님 생전에 했던 ‘코로나 효도’를 반성하게 된다. 가르치고 남기신 많은 것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과거, 형제 많은 집에선 가정이 곧 리더십 도야의 장이었다. 엄격한 가부장제 아래에서 동생들은 장남의 말을 곧 아버지의 말인 것처럼 따라야 하는 시절이었다. 엄격하고 과묵하셨던 아버지는 장남을 늘 특별하게 챙겼고 어머니도 큰아들은 어릴 때부터 어른으로 대접했다. 대신 그만큼 언행에 신중을 기해야 했고 성장과정에서 기대에 버금가게 동생들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할 뿐 아니라 독립 후에도 부모님을 봉양하고 동생들의 앞길을 개척해 주어야 할 책무를 지닌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리더의 자질과 품성을 차곡차곡 체화한다.

나는 둘째로 태어났다. 형님은 꽤 성장하셔서 돌연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나는 졸지에 장남의 완장을 차게 되었다. 줄줄이 딸려 있던 연년생 동생들은 친구처럼 지내던 형이 어느 날 장남이랍시고 무게를 잡으니 반감이 생겼던 듯하다. 내 딴에는 장남으로서 권위를 담아 한 말들에 토를 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드는 것 아닌가? 다툼 끝에 분을 참지 못하고 몽둥이질을 해댔고 그 동생은 피까지 흘리는 상처가 나고 말았다. 그날 동생들의 눈초리는…

그날 밤 다른 형제들이 모두 잠든 시각 아버님은 나를 안방으로 부르셨다. 동생에게 매질을 한 데 대한 꾸지람을 각오한 채 눈을 질끈 감고 아버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회초리 대신 날아온 것은 아버님의 인자하고도 따뜻한 격려와 훈화였다. 장남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매가 아닌 말로 감화시킬 수 있는지, 동생들 간의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시종 온화하고 진지한 말투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몇 번이고 아버님 머리맡에 무릎을 꿇었고 아버님은 당신의 경험과 지혜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다. 그 특별한 가르침이 이후 장교로서, 그리고 직장인으로서 리더십의 근간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복잡한 리더십 이론이 홍수를 이루는 세상이다. 누군가는 왕조 시대 임금과 장수의 행적에서, 또 누군가는 성공한 기업의 CEO에게서 리더십의 요체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한다. 화려한 수사로 꾸며진 리더십 이론들을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잘 활용하며 살아가는가? 모두가 리더십을 이야기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진짜 리더를 찾지 못하고 범람하는 리더십 이론들은 빌보드 차트를 스쳐 지나가는 팝송처럼 짧게 명멸한다.

운 좋게 글로벌 기업의 경영진으로 성장하며 항상 최신의 리더십 트렌드와 이론을 접했지만 진짜 리더의 자질과 그 본질을 일깨워 준 것은 반세기 전 아버님의 머리맡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었다. 아버님은 늘 나에게 동생들을 배려하라 하셨고 품으라 하셨으며 언행을 신중히 하라셨고, 누가 볼 때나 혼자 있을 때나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가치는 솔선수범이었다. 가정 내에서 모두가 하기 싫은 일은 늘 장남인 내가 먼저 맡아서 하게 하셨는데 그때의 습성이 책임 있는 직장생활을 하게 만들어준 가장 큰 힘이자 가치였다. 내로라하는 석학과 이론가의 리더십 이론에 비하면 고리타분하고 낡은 가치들이지만 이 시대의 많은 이들이 얻은 그 가치들이 모여 우리 기업의 세계적인 성장에 보탬이 되었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은가?

이래저래 나라가 뒤숭숭한 요즘이다. 국민의 삶은 위축되어 있고 경제는 얼마나 긴 터널을 지나야 할지 감도 잡기 힘든 실정이다. 언제쯤 “쨍하고 해 뜰 날”이 올지 가늠조차 못한 채 그저 하늘만을 바라본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리더는 어떤 유형의 인물인가? 메시아일까? 아님?... 힘들다 보니, 불현듯 떠오른다. 날 꾸짖고 바로잡아줄, 아버지. ‘그립습니다, 당신이.’오늘 참 허하다.

이근면 전 인사혁신처장ㆍ성균관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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