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젊은이들은 멘토는 필요로 하는데, 꼰대는 싫어한다. 얼마나 꼰대가 싫었으면, ‘라떼(나 때)는 말이야’가 광고 카피로까지 나오며 유행하겠는가? 그러나 사실 멘토와 꼰대의 간극은 그리 크지 않은 간발의 차이일 뿐이다.
문맹률이 높던 과거에는 문자만 알아도 지식인 취급을 받곤 했다. 이로 인해 특정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면, 기존의 지배층인 문자를 아는 이들을 천민화시켜 민중의 권위를 상실하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했다. 혹시 있을 반전의 실마리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불교가 주도 세력이 되자, 그 이전의 지식인 계급이었던 무속인들은 하층으로 몰락한다. 이는 조선의 등장과 함께 신진사대부가 주류가 되자, 불교 역시 한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을 통해서 반복된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말처럼, 오르지 않았으면 내려감도 없고 또 견제될 바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구한말 이래의 대격변 속에서, 유생들 역시 존재감을 상실한 지 오래다. 오늘날 ‘양반’은 어른들의 언쟁에서나 간혹 등장하는 ‘이 양반이!’라는 외침과, 구운 김의 상표 속에서만 확인될 뿐이다. 즉 이들은 무속인이나 승려보다도 더한 지난날의 사라진 화석인 셈이다.
현대 사회에서 문자는 지식인의 상징일 수 없으며, SNS나 OTT를 통해서 밀어닥치는 정보는 그야말로 쓰나미를 방불케 한다. 때문에 오늘날 지식인 소리를 들을라치면, 포털을 넘어서는 탄탄한 내공과 첨단 자료의 분석 등 요구되는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그만큼 지식인의 길은 험난하며, 진정한 스승은 요원한 것이다.
1980∼2000년에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는, 최고의 교육 수준과 첨단기술의 활용에 능하지만 동시에 가장 빈곤한 이들이다. 국가의 성장 정체로 인해, 이들이 바라는 것은 이들의 선택지(選擇肢)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밀레니얼 세대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이로 인해 이상과 빈곤의 갈등 구조 속에서, 젊은이들은 현실의 미로를 헤매게 된다.
밀레니얼 세대가 멘토의 필연성을 강하게 요청하는 것은 이들의 고뇌를 잘 나타내준다. 그러나 그 멘토는 반드시 ‘존중의 리더십’을 갖춘 낮은 곳의 스승이어야만 한다. 성장시대의 과거 경험만을 되뇌는 앵무새는 이들에게 필요치 않다. 배려의 공감에서 전달되는 따듯함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의 많은 분은 독일이나 중동에 가서 일을 했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경제의 밑거름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랬기 때문에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은, 이제 꼰대의 외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차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참 스승이 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스승을 선지식(善知識)이라고 한다. 선지식이란, 올바른 선(善)으로 인도해서 행복에 이르도록 하는 인도자이다. 참다운 선은 반드시 행복과 통하는 진실된 가치이기 때문이다.
현실 문제의 타개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환기하는 것은 또 다른 유용함이 될 수 있다. 인간이 경험하는 것과 인식하는 것은, 동일한 궤적을 형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힘든 현실 속에서 무너짐과 극복의 나뉨은, 견고한 가치관의 확립과 내면의 식지 않는 열정에서 비롯되곤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스승으로서의 선지식은 필요하다.
선지식은 시대를 이긴 초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며 자신을 바루는 소박한 실천가 속에 존재하는 분들 역시 선지식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또 꼰대 또한 개발시대를 힘들게 산, 슬픔의 낙인이 서린 이들임을 밀레니얼 세대 역시 이해할 필요가 존재한다. 진정한 공감이란, 일방향이 아닌 양방향이며 화합이야말로 공동체의 존립에 있어서 최우선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자현 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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