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노동자 90%가 여성
‘잠시 멈춤’이 불가능한 돌봄
상호 간 건강 연결성 환기시키며 ‘돌봄의 사회화’ 정의 변화의 계기
“누구나 감염될 수 있다”
두려운 것은 감염자체가 아닌 감염이 차별의 이유ㆍ결과 되는 것
‘쓸모’로 차등화한 건강관 탈피를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확진자를 바이러스 숙주 아닌 치료ㆍ돌봄 필요한 동료시민 인식
혐오ㆍ배제의 시선 벗어던져야
‘코로나19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명제 앞에서 페미니즘도 예외가 아니다. 구로콜센터 집단감염이 보여줬듯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방역에 취약한 여성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이 드러났고, 젠더 간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같은 시기 국내에서는 디지털 성착취 범죄의 실상이 텔레그램 ‘n번방’ 사태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한국일보는 신종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한국 사회가 맞이한 위기와 전환의 시기를 페미니즘 시각에서 살펴보기 위해 다섯 명의 국내 대표적인 페미니즘 연구자들의 글을 연재한다.
“매독은 영국인들에게는 ‘프랑스 발진’이었으며, 파리 사람들에게는 ‘독일 질병’, 플로렌스 사람들에게는 나폴리 질병, 일본인들에게는 중국 질병이었다.” 수전 손택이 ‘에이즈와 그 은유’에서 15세기 유럽을 휩쓴 감염병 매독에 대해 묘사한 구절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 ‘우한 폐렴’이라는 명명부터 ‘신천지’, ‘대구경북’, ‘해외입국자’를 지나 ‘이태원 클럽’까지, 우리는 감염병을 ‘그들에게서’ 온 것으로 돌리고자 하는 강력한 사회심리적 충동을 목격 중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나아지고 있는가? 혹은 ‘나아진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만은 절대 감염되지 않는 것?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와 함께 소위 ‘뉴 노멀(New Normal)’에 대한 무수한 담론들이 쏟아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중 상당수는 전혀 새롭지 않은 것들이다. 원격의료 추진 움직임이 그렇고, 재택근무와 ‘노동유연화’ 논의도 그렇다. 무엇이 어느 방향으로 새로워져야 하고(‘뉴’) 어떤 것은 변함없이 지켜져야 하는지, ‘정상(노멀)’과 ‘비정상’의 관계는 어떻게 재설정되어야 하는지를 근본적으로 되묻지 않는다면, 애초에 2000년대 1세계 투자자와 경영자들이 고안한 용어였던 ‘뉴 노멀’은 그저 또 다른 권력의 용어로 남을 것이다. “코로나19는 위기이자 새로운 기회”라는 말을 낭만적으로 쓰지 않기 위해, 아픈 사람들, 돌보는 사람들, 가장 비가시화되고 가장 타자화되며 가장 반복적으로 잊혀 온 사람들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병실에서의 페미니즘
지난 몇 달 동안의 코로나19 확산 과정은 재난도 재난 대책도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거듭 보여주었다. 청도대남병원과 요양병원 집단감염, 밀집된 자리에서 휴식도 없이 일해야 했던 콜센터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즉각적 위험에 처했던 중증장애인, 병원이 고용한 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마스크조차 지급받지 못했던 간병노동자, 대책 없이 해고된 요양보호사, 이주민들에게는 닿지 않았던 재난문자, 방역의 핵심인 검사 자체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성소수자 혐오. 열거하자면 끝이 없고, 연루되지 않은 시민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광범위하다. 이런 상황에서 ‘인권’을 ‘배부른 소리’로 치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배부른 위치’에서 하는 생각일 것이다. 모두를 안전하게 하지 못하는 ‘안전조치’는 사실상 누군가에 대한 차별조치가 된다.
건강약자의 존재는 사회의 불평등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근본적 취약성을 일깨우지만, 그 취약성을 직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은 매우 부족하다. ‘여성’이 정치적 구성물이 아니라 ‘자연적 성차’로 본질화되어 왔던 것처럼, 질병과 늙음 또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탈정치적인 ‘생물학’의 문제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약자의 인식론이자 더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으로서, 페미니즘은 ‘약함’에 대한 우리 사회의 거리두기와 본질화를 질문한다. 단지 (저 멀리 있는) 콜센터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현실에 개탄하고 (나와는 무관한) 요양보호사들의 해고를 걱정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관건은, ‘누구나 감염될 수 있다’는 취약성을 어떻게 (그들이 아닌)우리의 문제, 공동의(common) 기반이자 공적인(public) 의제로 변환해낼 것인가에 있다. 분노나 개탄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를 만들어가는 것은 제도와 문화, 경제체제의 변화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변화까지 요구한다. 코로나19가 드러낸 인간의 취약성과 ‘나만 건강한’ 것이 불가능한 근원적 연결성은 지금 우리가 함께 토론해야 할 거대한 질문이다.
◇‘돌봄의 사회화’는 답이 아니라 문제다
코로나19가 드러낸 또 한 가지는, 돌봄은 언제나 위기였지만 잘 감춰져 있었을 뿐이었다는 사실이다. 가족과 시장 모두에서 돌봄 노동이 ‘잠시 멈춤’되자마자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돌봄은 ‘잠시 멈춤’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삶과 생명을 지탱하는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중증장애인이 자가격리자가 되자 바이러스보다 먼저 삶을 위협한 것은 돌봄의 중단이었다. 요양병원이나 어린이집 등 ‘돌봄을 사회화’한 장소라 여겨졌던 곳들이 더 먼저 문 닫고, 더 많이 감염되고, 더 빨리 격리됐다.
가족을 돌보는 시민 중 80% 이상, 간병인 등 가족 밖에서 일하는 돌봄노동자 중 90% 이상이 여성이다. 돌봄이 단어 자체만으로도 많은 여성에게 ‘지겹고’ 부담스러운 이유는 명백하다. 돌봄과 무관한 인간은 없다. 무관한 척 살도록 허용하는 부정의한 구조가 있을 뿐이다. 코로나19의 경험은 인간의 취약함과 서로에게 건강을 빚진 연결성을 환기함으로써, 이 오래된 돌봄 부정의를 변화시키는 공적인 계기가 돼야 한다. 우리가 목격한 놀라운 장면들이 있다. 대구로 달려간 의료인들, 마스크와 소독제를 나눈 시민들, 자가격리자를 함께 돌본 이웃들. 이제 이런 장면들이 한때의 감동으로 휘발되지 않게 하는 집단적 의지와 역량이 필요하다. 돌봄을 ‘사회화’한다는 것은 단지 여성들이 집에서 해온 무급노동을 집밖에서 돈 받고 하는 것 이상이어야 하고, 사장이 아니라 국가가 여성을 돌봄노동자로 고용하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 지역사회 감염이 계속되면서 ‘어디도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과 피로가 누적되고 있다. 어디도 안전하지 않다면, 답은 모든 곳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아프면 쉬는 사회는 어떻게 오는가
‘아무도 감염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감염될 수 있다는 것’이 기준이 되는 사회라면 어떨까? 지금 두려운 것은 단지 감염 자체가 아니다. 감염이 차별의 이유이자 결과가 되는 것, 계속해서 비난할 ‘그들’을 지목하고 낙인찍는 것이야말로 공포스럽다. “아프리카에서 코로나19 백신을 실험하자”고 주장한 프랑스 의료전문가들의 발언에 경악했다면, 바로 그 감각이 갈림길이다. 이 경악의 감각이 단지 ‘K-방역’에 대한 자부심으로만 끝나는 것은 허무하다. 우리는 결코 사회를 거대한 음압병동처럼 ‘위생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 평균 17.5년, 한국은 5년 후 초고령사회가 된다. 무병장수는 개인의 순진한 꿈일 뿐 아니라 사회변화를 가로막는 끈질긴 환상이다.
아프면 쉬는 사회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아픈 사람들, 손상과 노화를 겪는 사람들, 그리고 돌보는 사람들의 자리에서 분석과 모색을 시작할 때 가능하다. 모든 인간의 취약성과 의존성을 기본값으로 하는 사회. 이것은 ‘국민체조’ 이후 젊고 건강하고 생산적인 몸을 규범화하고 ‘쓸모’를 중심으로 존엄성을 차등해온 국가와 자본 중심 건강관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한다. 나아가 누구도 서로를 돌볼 책임으로부터 면제될 수 없도록 가족과 경제를 재구조화하는 젠더정의의 실현을 의미한다.
◇감염병의 시대, ‘역설’을 계속 갱신하기
지난 3월 청도대남병원에서 제대로 된 정보나 보호장비 없이 일하던 간병인이 환자와 함께 사망한 사건은 ‘답 없어 보이는’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는 서로를 ‘감염원’으로 여기기 쉬우며, 권력구조의 하층에 있는 이들일수록 이런 상황에 더 많이 놓이게 된다. 요양보호사와 환자가 서로를 ‘바이러스 옮길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여긴다. 그 결과 요양보호사는 해고되고, 환자는 위험에 처하며, 보호자는 직장에 휴직계를 내고, 그 직장의 동료는 격무에 시달리다 병을 얻는다. 건강과 안전이 어느 한쪽만 얻을 수 있는 희소자원으로 오인되면, 결국 모두가 위험해진다. 인권이 그러하듯, 건강과 안전 역시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여자를 위해주자’라거나 ‘여자도 이겨보자’는 것이 아니라, 승패를 넘어서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회, 약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극복’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 삶을 상상하자는 제안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코로나19 이후를 다르게 만드는 힘은 ‘각자 강해지는 것’에서가 아니라 서로의 약함을 돌보고 책임지는 것에서 나온다.
페미니스트 역사학자 조운 W. 스콧은 ‘페미니즘, 위대한 역설’이라는 책을 쓴 바 있다. ‘역설’, 말하자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살아가는 약자들은 서로 모순돼 보이는 과업을 동시에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똑바로 서려는 노력과 운동장의 기울기 자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여성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 생각해보면 페미니즘 운동의 긴 역사에서 ‘역설’이 제거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코로나 이후의 사회를 위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건강을 추구하는 동시에 건강규범을 해체하는 것, 그래서 인간의 취약성과 의존성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건강’을 다시 정의하는 것. 백신과 치료를 위해 힘쓰는 동시에 확진자를 ‘바이러스 숙주’가 아니라 치료와 돌봄이 필요한 동료시민으로 인식하는 것, 철저한 방역을 위해 합심하는 동시에 ‘완벽한 통제’의 불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혐오와 배제의 언설로부터 보호하는 것. 이런 것들을 위해 함께 토론하고 나아가자고.
전희경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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