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은 고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의 11주기였다. 1952년생인 그는 돌이 될 무렵 소아마비를 앓았고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됐다. 목발은 평생 그의 벗이었다. 그에겐 1급 신체장애보다 차별과 싸우는 일이 어쩌면 더 힘겨웠을 것이다. 그는 그러나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류의 값싼 포장 문구를 거부했다. 남은 이들이 고인의 삶을 향기롭게 기억하는 것도 그의 수필에 담긴 ‘인간 장영희’의 따뜻한 시선 때문이다. 그는 월간 ‘샘터’와 일간지에 수필과 칼럼을 꾸준히 연재해 대중과 만났고, 단행본도 여러 권 펴냈다.
□ 성추행으로 사퇴하고 두문불출하던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지난 4일 경남 거제의 한 펜션에서 목격됐다. 취재진을 보곤 그는 도망치듯 황급히 차에 몸을 실었다. 선캡을 푹 눌러쓴 채 마스크를 한 그는 “오 전 시장 아니시냐”는 질문에 “사람 잘못 봤다”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 바삐 걸음을 옮기던 그의 왼손엔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바로 장영희 교수가 2005년 출간한 ‘문학의 숲을 거닐다’였다. 문학 작품과 일상의 단상을 엮은 문학 에세이 61편이 실려 있다.
□ 그 책 서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너와 내가 같고,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이 인간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고뇌와 상처를 이해하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다.’ 공교롭다. 성추행은 다른 이의 몸은 내 것과 같이 소중하며, 함부로 해쳤을 때 상대는 큰 충격과 고통에 빠진다는 인간 보편의 상식을 모르거나, 알고도 무시하는 자들이 저지르는 범죄다. 이걸 읽고 오 전 시장은 과연 뜨끔했을까. 게다가 그가 잠적한 보름여 사이, 추가 성추행에 채용 비리 의혹까지 터진 상황이다.
□ ‘문학의 숲을 거닐다’엔 이런 구절도 있다.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그에게 동정을 느끼고 ‘같이 놀래?’라고 말하며 손을 뻗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다.’ 세간의 시선에서 비켜나 요양인지, 수양인지 모를 침묵의 시간을 보내는 게 오 전 시장 자신을 위해서도 과연 능사인지 돌이켜 보길 바란다. 지금 오 전 시장이 해야 할 일은 피해자에게 진정으로 사과하고 자신을 향해 제기된 의혹에 솔직하게 해명하는 것이다. 나아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응당한 법적ㆍ도덕적 처벌을 받는 것만이 세상과 화해하는 길 아닐까.
김지은 논설위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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