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중반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세계는 유례없이 격변했고, 그 시작부터 부작용도 동반했다. 진앙지 영국 런던 등 대도시는 몰려든 농촌 인구로,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긴 실업자들로 넘쳐났다. 범죄도 급증했다. 가뜩이나 비좁아진 도시는 죄수들을 수용할 감옥이 부족해 애를 먹을 정도였다.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건축가였던 동생을 도와 혁신의 감옥 ‘파놉티콘’ 구상을 세상에 소개한 게 그 무렵인 1786년이었다.
범죄자의 격리는 토지나 비용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존재 자체가 시민사회와 자본주의 노동 윤리의 위협이었다. 그 압력의 배출구를 영국은 식민지 미국에서 찾았고, 메릴랜드와 버지니아, 조지아 등지로 죄수 약 5만명을 실어 날랐다. 이른바 ‘유형식민지(Penal Colony)’였다. 1780년대 미국 혁명(독립전쟁)으로 식민지를 빼앗긴 뒤 영국은 태평양 너머로 눈을 돌렸다. ‘뉴사우스웨일스’라 부르던 호주 대륙이었다. 죄수 외에 선원과 가족 등 1,403명과 가축, 식량 등 물자를 실은 11척의 배(6척 범죄자 수송선)가 함장 아서 필립(Arthur Phillip)의 지휘 하에 1787년 5월 13일 잉글랜드 포츠머스항을 출항했다. 죄수 수송선 ‘최초의 함대(The First Fleet)’였다.
그들은 탐험가 제임스 쿡이 개척한 항로를 따라 252일간 약 2만km를 항해, 이듬해 1월 18일 호주 북부 보타니만(Botany Bay)에 닿았다. 도중에 아이 7명이 태어났고, 죄수 40명을 포함 모두 69명이 숨지거나 항해 도중 질병 때문에 중간 기착지에서 하선했다. 필립은 배를 정박할 만한 수심과 식수로 쓸 샘이 있는 보타니만 북쪽의 천혜항을 발견, 영국 깃발을 꽂았다. 그곳이 당시 식민지 정책을 총괄하던 영국 내무성 장관 시드니 경(1733~1800)의 이름을 딴 ‘시드니항’이고, 그날이 오늘날 호주 국경일인 1월 26일(호주의 날)이었다.
동시에 그날은 4만~7만년 전부터 그 땅에 살던 애보리진 즉 호주 원주민들의 시련이 시작된 날이었다. 영국 정부는 80년 뒤인 1868년에야 호주로 죄수들을 보내는 걸 멈췄다. 그 무렵 영국에 호주는, 자발적으로 이주한 영국 개척민과 죄수들의 강제노동으로, 감옥으로 쓰기에는 너무 값진 식민지로 변모해 있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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