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팍스 시니카
‘팍스 시니카’는 중국이 세계를 주도하는 시대를 말한다. 팍스 시니카가 주목 받는 까닭은 두 가지다. 하나가 다가오는 미래에 팍스 시니카가 ‘팍스 아메리카나’를 대신할 수 있느냐라면, 그게 실현된다면 과연 언제쯤일까가 다른 하나다. 근대 이후 세계질서를 주도해온 것은 ‘팍스 브리태니카’와 팍스 아메리카나였다. 다시 말해, 근대 문명은 16세기에서 20세기까지 서유럽과 미국 중심의 ‘대서양 시대’였다. 그런데 그 중심이 태평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중국으로 이동해 왔다. ‘태평양 시대’가 열려온 셈이다.
◇중국몽의 빛과 그늘
지난해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년을 맞았다. 중국 국가통계국과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70년 동안 이뤄진 성과를 발표했다. 국내총생산(GDP)은 1952년 679.1억위안에서 2018년 90조309억위안으로 1,326배 증가했고, 1인당 GDP는 119위안에서 6만4,644위안(2018년 환율 기준 9,732달러)으로 543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1차, 2차, 3차산업의 비중은 50.2%, 20.8%, 28.7%에서 7.1%, 40.7%, 52.2%로 변화했다. 무역규모의 경우 1950년 11.3억달러에서 2018년 4.6조달러로 4,071배 증가했다. 중국 자체 평가처럼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21세기에 들어와 중국의 성장은 가팔랐다.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에서 중국은 2007년 독일을, 2010년 일본을 추월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8년 세계 총GDP에서 24.2%로 1위를 차지한 미국에 이어 15.8%로 2위를 기록했다. 2010년대는 G2 시대의 개막을 알린 10년이었다.
G2 시대에 중국의 야망을 보여준 말이 ‘중국몽(中國夢)’이었다. 2012년 제12기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된 시진핑 주석은 21세기 세계 초강대국으로 도약하겠다는 중국몽을 미래 비전으로 제시했다. 중국몽은 경제영역과 군사영역을 기반으로 해 세계 문명을 주도해가는 국가가 되겠다는 야심만만한 목표를 담고 있었다.
중국몽의 바탕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200년에 대한 중국 정부의 역사 인식이 깔려 있었다. 정치학자 이문기가 지적하듯, 아편전쟁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직전까지가 ‘100년 굴욕(1840~1948)’의 시기였다면, 수립 이후부터 100년 후까지는 ‘100년 부흥(1949~2050)’의 시기라는 것이다. 2017년 중국 공산당은 제19차 당대회에서 중화민족의 부흥으로 가는 일정표를 내놓았다. 2020년 전면적 샤오캉(小康)사회 실현, 2035년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의 기본적 실현, 2050년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의 완성을 하겠다는 게 그것이었다.
이 중국몽에는 과거 문명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났다가 다시 중심을 이루겠다는 원대한 꿈이 집약돼 있다. 중국의 재부상에 대한 예견이 중국인들만의 것은 아니다. 종속이론을 이끈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리오리엔트’에서 말한다.
“아시아, 특히 중국은 비교적 최근까지 세계경제에서 위세를 누렸던 만큼 머지않아 그것을 되찾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 아시아는 한 세기에서 한 세기 반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만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내주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대한 꿈을 실현시킬 만한 능력을 중국은 과연 갖고 있는 걸까. 중국몽을 앞세운 2013년까지 중국은 10%에 달하는 고속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중국의 성장률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2014년 시진핑은 중고속성장의 ‘신창타이(新常態)’, 곧 ‘뉴 노멀’을 내놓았고, 2010년대 후반에는 6%대 성장률을 기록해 왔다. 이러한 추세를 물론 과소평가하기 어렵지만 그 속도가 한풀 꺾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2020년대와 팍스 시니카의 미래
팍스 시니카가 열릴 것인지의 물음은 팍스 아메리카나가 저물고 있는지의 질문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 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활력을 되찾았다. 트럼프정부는 무역전쟁을 통해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시작했고, 최근 힘의 우위를 기반으로 중국의 미국산 제품 구입 등의 목표를 잠정 달성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2020년대에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먼저 분명한 것은 세계 헤게모니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 간의 경제전쟁이 더욱 치열해질 게 명확하다는 점이다. 10년이란 시간만을 생각하면 팍스 아메리카나가 계속 유지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2050년까지 길게 보면 팍스 시니카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도 어렵다. 정치학자 현인택은 ‘헤게모니의 미래’에서 다섯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① 미국이 퇴조 후 재상승하는 ‘미국 헤게모니 유지’, ② 미국이 퇴조하지만 중국과의 격차를 유지하면서 가는 ‘미국 우위적 양극체체’, ③ 헤게모니 변환이 일어나지만 미국의 점진적 퇴조가 진행되는 ‘중국 우위적 양극체제’, ④ 헤게모니 변환 후 미국의 급격한 퇴조가 일어나는 ‘중국 헤게모니 체제’, ⑤ 헤게모니 전쟁을 통해 헤게모니 변환이 일어나는 ‘미국 또는 중국 헤게모니 체제’가 그것들이다.
①에서 ④에 이르는 시나리오의 헤게모니 경쟁은 2020년에서 2050년까지의 30년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 경쟁을 결정하는 주요 변수들로 현인택은 4차 산업혁명의 성공 여부, 세계경제의 안정화, 국제제도의 안정화, 동맹의 회복, 군사혁신의 성공, 정체(正體)의 안정적 발전을 들고 있다. 현인택은 2050년까지 기성 미국 헤게모니가 유지되고, 그 이후에는 미ㆍ중 양극체제로 갈 것으로 전망한다.
팍스 시니카의 가능성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정치체제 문제다. 현재의 중국은 공산당이 압도적 지배를 행사하는 권위주의 국가다. 이 권위주의체제가 경제적 동원을 극대화해야 하는 초기 산업화에선 유리한 조건이었지만, 창의성과 활력을 중시해야 하는 후기 산업화에선 결정적 장애가 될 수 있다. 저널리스트 조너선 펜비는 ‘버블 차이나’에서 말한다.
“시진핑이 계속해서 강화하고 있는 그 권력체제가 그어놓은 이 한계는 중국이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진화할 수 있는 능력을 제약할 것이다. 중국의 일차적인 관심이 집안에서 ‘차이나 드림’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중국이 지배하는 21세기를 보기란 난망할 따름이다.”
민주주의를 결여한 권위주의로 세계 헤게모니를 획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헤게모니에 담긴 중요한 의미는 다른 나라들의 자발적 ‘동의’에 있다. 일방적 ‘강제’에 기초한 권위주의체제로 세계 헤게모니를 창출하고 행사하기는 사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돌아보면 지난 10년 동안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더없이 치열했다. 정치학자 문정인이 지적하듯, 세계 헤게모니를 두고 두 호랑이가 겨뤄온 형국이었다. 두 호랑이의 충돌은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이 예고한 ‘투키디데스 함정’을 보여준다. 투키디데스 함정이란 기성 헤게모니국가와 신흥 강대국이 결국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뜻한다. 미국의 입장에선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 질서를 수용할 수 없는 반면, 중국의 입장에선 아시아는 물론 세계를 향한 중국몽을 포기할 리 없다. 2020년대에 이 두 강대국의 경쟁이 세계 곳곳에서, 특히 동아시아에서 격화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까닭이다.
◇한국사회와 지정학
우리 사회에서 팍스 시니카는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반만년 역사에서 최근 100년을 빼놓고 보면 중국은 우리나라에 가장 중요한 국가였다. 조선 시대에는 한때 소중화(小中華)를 표방하기도 했다. 1992년 수교 이후 중국은 빠른 속도로 우리 경제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부상했다.
지정학(geopolitics)은 국가의 대외적 운명을 결정하는 일차적 조건이다.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100여 년 전과 유사하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우리는 미국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해양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지만, 이제 중국과 러시아로 대표되는 대륙세력과의 관계도 강화할 수밖에 없다.
2020년대에 동아시아는 세계 헤게모니를 놓고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경쟁의 최전선을 이룰 것이다. 이러한 조건 아래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라는 양 날개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균형 잡힌 대외정책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는 이념의 차이를 넘어 존재하는 우리의 가장 중대한 대외과제이며, 따라서 이에 대한 정치ㆍ사회적 합의가 요청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의 굿모닝 2020s’는 2020년대 지구적 사회변동의 탐색을 통해 세계와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국일보> 연재입니다. 매주 화요일에 찾아옵니다. 다음주에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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