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디바’ 나하나 “거침없는 록 샤우팅, 여성 저항 상징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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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 디바’ 나하나 “거침없는 록 샤우팅, 여성 저항 상징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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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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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계 차세대 디바’로 꼽히는 배우 나하나는 요즈음 여성 4인조 록 뮤지컬 ‘리지’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그는 “관객들이 얼마나 어렵게 공연장을 찾아 오는지 잘 알고 있다”며 “배우들도 오늘만 산다는 마음가짐으로 매 공연 혼신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정준희 인턴기자

“리지 보든, 도끼로 엄마한테 마흔 번. 아빠한텐 아니야, 마흔하고 한 번 더.”

거친 록 사운드와 잔혹한 노랫말이 고막을 할퀸다. 배우 나하나(28)의 목소리는 구슬픈 절규인 듯, 들끓는 분노인 듯 천장을 뚫을 기세로 거침없이 내달린다. 코로나19로 인한 ‘함성 자제’ 방침만 아니었다면, 뮤지컬 ‘리지’ 공연장은 록페스티벌 분위기였을 것이다. 최근 서울 동숭동 한 카페에서 마주한 나하나는 “다 같이 헤드뱅잉을 하고 떼창을 부를 그날을 기다리며 조심스럽게 공연하고 있다”고 생긋 웃었다.

뮤지컬 ‘리지’는 1892년 미국 사회를 경악하게 한 ‘리지 보든 사건’을 토대로 한다. 부유한 사업가 집안 막내딸이 도끼로 친부와 계모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다 풀려난, 지금도 회자되는 미제 사건이다. 뮤지컬 ‘빨래’ ‘시데레우스’ ‘테레즈 라캥’ ‘시라노’ 등을 거치며 ‘뮤지컬계 차세대 디바’로 주목받는 나하나는 배우 유리아와 리지 역을 번갈아 연기한다.

“대본을 읽고 호기심이 생겨서 실제 사건을 열심히 조사했어요. 리지의 행동과 성향이 예측 불가하고 자료마다 해석도 달라서 쉽게 밑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어요. 우발적 살인인지, 치밀한 계획 범죄인지도 모호했죠. 그래서 더 흥미로웠어요.”

친부의 성적 학대를 겪은 리지는 잔혹한 방식으로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난다. 쇼노트 제공
‘리지’의 여배우 4명이 내지르는 강력한 노래는 뮤지컬 공연장을 록페스티벌 같은 흥분과 열광으로 가득 채운다. 왼쪽부터 배우 김려원 이영미 나하나 최수진. 쇼노트 제공

화제의 사건이었던 만큼 책 영화 연극으로 숱하게 다뤄졌지만, 뮤지컬은 여성주의적 해석에 무게를 싣는다. 주인공도 리지, 그의 언니 엠마, 가정부 브리짓, 리지의 친구 앨리스 등 여성 4명이다. 억압적인 환경에서 친부에게서 성적 학대를 당한 리지를 중심으로 여성들의 은밀한 연대가 형성된다. “이건 사랑 아냐”라고 울부짖던 리지는 피 묻은 드레스를 태우며 자아를 해방시킨다. ‘n번방’ 사건을 떠올린 관객들은 그런 리지에게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나하나는 “피해자들의 고통을 이 작품으로 대변하겠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면서도 “다만, 허용된 극 안에서 가해자를 직접 처벌하는 통쾌함, 여성에 대한 폭력을 깨부수는 용기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극이 ‘저항의 음악’ 록을 택한 건 자연스럽다. 그는 “서사 덕분에 록 음악의 매력을 새롭게 알게 됐다”며 “여자들만 등장하는 극이라서 남다른 책임감과 연대감도 느낀다”고 했다.

맑은 음색을 자랑하던 나하나에게 록 발성은 도전이기도 했다. ‘헤드윅’ ‘밴디트’ 등 록 뮤지컬 경험이 많은 브리짓 역의 이영미를 스승 삼았다. “‘이영미 노래 교실’ 덕분에 노래가 늘었어요. 선배들과 신나게 노래하면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눈빛만 마주쳐도 힘이 솟아요.”

무대 밖 나하나는 털털하고 명랑하다. 둥글둥글한 성격 덕분에 무대가 주는 압박감도 잘 견디는 것 같다는 게 지인들의 전언이다. 정준희 인턴기자

뮤지컬계에서 나하나의 성장세는 가파르다. 2016년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의 앙상블로 데뷔한 이후 불과 4년 만에 출연작이 10여편에 이르고, 대부분 주연을 맡았다. 올해만 대극장 뮤지컬 ‘빅피쉬’를 비롯, ‘비아 에어 메일’과 ‘리지’까지 세 편째다. “빗자루로 무대 구석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좋으니 뮤지컬 무대에 한 번 올라 보는 게 꿈이었다”는 나하나에겐 요즈음 매 순간이 ‘황홀’ 그 자체다. 류정한, 김선영, 김소현 등 선망하던 배우들과 한 무대에 섰다는 게 아직도 마냥 신기하기만 하단다.

충남 서천군 바닷가 마을에서 자란 나하나는 자신처럼 “음악을 접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서” 10대 때 실용음악을 공부했다. 그러다 우연히 본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 빠져 스물두 살에 한예종 연기과에 들어갔다. 음악과 연기, 뮤지컬에 필요한 두 자양분이다. 경력에 비해 큰 역할이 맡겨진 게 결코 행운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나하나는 매 공연을 녹음해서 점검하는 습관이 있다. 스스로 잘했다 싶은 음원은 저장해 둔다. “작품마다 딱 하나만 남긴다”고 했다. “더디게 가도 좋으니 기본기가 잘 갖춰진 배우가 되고 싶어요. 안주하지 않고 채우고 다듬어서 더 좋은 무대를 보여드릴게요.” 6월 21일까지 드림아트센터.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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