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언택트 시대, 여성들을 ‘새로운 얼굴’로 소비해온 문화 바뀌어야

알림

언택트 시대, 여성들을 ‘새로운 얼굴’로 소비해온 문화 바뀌어야

입력
2020.05.12 01:00
수정
2020.05.12 15:07
10면
0 0

떠들썩했던 ‘n번방 사건’

화장실 몰카 등 불법촬영물

관람자의 얼굴은 노출하지 않고 상대 여성의 얼굴을 보려는 호기심

‘신종 범죄’ 아닌 새로운 조합

텔레그램ㆍ암호화폐 등 신기술 범죄 적용에 대한 호들갑보다

여성ㆍ소수자 의제에 초점 맞춰야

코로나가 촉발한 비대면 문화

얼굴 가리는 게 허용 안 되는 서비스직ㆍ성매매 여성들에게도

동일한 미래가 허용될 수 있을까

‘코로나19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명제 앞에서 페미니즘도 예외가 아니다. 구로콜센터 집단감염이 보여줬듯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방역에 취약한 여성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이 드러났고, 젠더 간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같은 시기 국내에서는 디지털 성착취 범죄의 실상이 텔레그램 ‘n번방’ 사태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한국일보는 신종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한국 사회가 맞이한 위기와 전환의 시기를 페미니즘 시각에서 살펴보기 위해 다섯 명의 국내 대표적인 페미니즘 연구자들의 글을 연재한다.
광범위한 규모의 디지털 성착취물의 제작ㆍ유포가 이뤄진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된 3월 25일, 시민들이 종로경찰서 앞에서 ‘조주빈에게 법정최고형을 선고하라!’, ‘N번방에서 감방으로’ 등의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광범위한 규모의 디지털 성착취물의 제작ㆍ유포가 이뤄진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된 3월 25일, 시민들이 종로경찰서 앞에서 ‘조주빈에게 법정최고형을 선고하라!’, ‘N번방에서 감방으로’ 등의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의 일상은 전과 비교해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지고 있다. 비대면적 삶의 양식이 확산될 것이라는 전망이 대표적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디지털 기술 없이는 불가능했다. 동시에 우리는 디지털 기술이 모두에 동일하게 경험되지 않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기술의 사회적 측면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있었다.

지난 수년간 여성들은 몰래 촬영된 영상물이 ‘국산 야동’으로 거래되는 일상 문화를 ‘디지털 성범죄’로 명명하고 문제제기 해왔다. 그리고 n번방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러한 현실은 누군가에겐 전혀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다.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는 피해자를 직접 대면하지 않고 영상물을 찾아다닌 호기심까지 범죄로 분류하는 것은 과도한 조치라고 말했다. 하지만 수많은 여성은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라는 말로 이러한 인식과의 단절을 선언한 바 있다.

이제 조주빈을 비롯해 텔레그램 성착취물의 제작과 유통에 직접 가담한 이들의 엄중 처벌에 관해서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위 ‘호기심을 가진 단순 참가자’ 역시 n번방 사건의 적극적 가담자라는 사실은 손쉽게 간과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호기심은 끝없이 여성을 ‘새로운 얼굴(new face)’로 소비하며 비인간화 해온 동력으로, ‘신종’이 아니다.

◇여성 개인의 비인간화와 남성 집단의 인간화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는 여성을 몰래 촬영한 영상물이 소라넷에서 유포된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도대체 그런 영상이 왜 유통되는지 많은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실 이들이 보고자 하는 것은 여성들의 ‘얼굴’이다. 여성들은 그 자신이 또 다른 새로운 얼굴이 되지 않고자 화장실 앞에서 마스크로 복면을 하고, 화장실 칸막이의 모든 나사와 구멍을 휴지로 메웠다.

‘국산 야동’에서 중요한 것은 ‘한국 여성’이라는 표식이다. 불법 촬영물 속 여성이 한국말을 하는 것, ‘○○대학 ○○학과 ○○학번 김○○’와 같은 신상정보, 때로 한국말 TV 프로그램이 배경 소음으로 들리는 것처럼, ‘한국 여성’이라는 인종적 범주화를 통해 ‘리얼물(real物)’이 만들어진다. 가까이에 실존하는 여성의 얼굴을 대면하고 그녀가 등장하는 영상물에 참여하는 기분으로 소비해온 호기심이 텔레그램 n번방을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만든 기대수요이다.

불법 촬영물 공유 네트워크는 언제나 끝없이 새로운 여성의 얼굴과 대면하기 위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고 정보와 노력을 공유한다. ‘얼굴의 윤리’를 이론화한 정치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를 인용하자면, 손쉽게 포착되는 약자의 얼굴은 ‘얼굴이 아닌 얼굴’이기 때문에 그 얼굴을 보는 사람은 그것에 동일시되지 않는다. 얼굴이 널리 알려진 여성 연예인의 불법 촬영물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으며, 마침내 ‘아는 여자’를 비인간화하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로서 ‘지인 합성’, ‘지인 능욕’의 딥페이크(deep fake) 기술이 동원되고 있다. 하지만 딥페이크 영상의 제작ㆍ유통 행위를 처벌하는 성폭력 특례법 개정안 논의 과정에서 고위 인사들은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 수 있다”거나 “청소년이나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 자주 한다”며 항변했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 집단의 (창작과 성장을 통한) 인간화는 개별 여성의 비인간화를 통해 달성된다고 가정된다.

디지털 세계를 떠도는 호기심은 관람자의 얼굴은 노출하지 않고, 상대 여성의 구체적인 얼굴을 대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또한 정보 공유 네트워크로 존재하는 남성 사회, 즉 비대면 성착취 그룹은 대면 성착취 구조와 참여자를 그대로 이어받는다. 그 결과 n번방은 항상 n개를 초과하며 26만의 성착취 가담자는 26만 명을 초과하게 된다.

2010년 여성가족부의 조사에 따르면 성산업의 경제규모는 8.71조 원이다. 그 해 한국의 남성 경제활동 인구(15~64세)가 한 명도 빠짐없이 1년에 60만 원을 소비해야 가능한 규모이다. 최근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강남의 한 룸살롱에 하루 동안 구매자와 종업원 총 500명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성매매 산업은 그 자체의 거대한 경제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성구매를 손쉬운 것으로 둔갑시켜 일상화하는 여러 장치를 마련했다.

구매자의 얼굴은 노출되지 않은 채 특수 처리된 유리방 안의 여성들을 ‘초이스’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직 미러’ 장치는 남성 구매자들에게 사람을 품평하고 고른다는 윤리적 갈등 없이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있다는 기분을 갖게 해준다. 성매매 업소는 불법 촬영물의 거대 집합소인 소라넷을 광고판으로 활용했다. 동시에 ‘뉴페(new face)’가 되어야 상품성을 갖게 되는 여성은 한 업소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개별 여성의 연쇄적 이동이 이루어지는 원리이다.

폭력으로 유지되는 경제에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강제’ 장치 역시 존재한다. “가족에게 업소에서 일한 사실을 알리겠다”는 신상 공개의 협박은 업소 주변에서 일상적이다. n번방 운영자들이 피해자 여성들에게 신상 공개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한 후 전달한 악성코드는 ‘스케어웨어(불안 소프트웨어)’라고 부른다. 디지털 세계와 현실에서 익명의 남성을 집단화하는 성적 실천은 여성의 고립화와 연동한다.

◇‘신종’ 성범죄가 만들어내는 판타스마고리

n번방 범죄는 전례 없이 끔찍하지만, 익숙한 것들의 새로운 조합이기도 하다. 하지만 텔레그램은 종단 간 암호화(end-to-end encryption) 기술이 적용되어 가담자 검거가 어렵다거나, 조주빈이 유료방 입장료를 암호화폐로 받는 철저함이 있었다든가, 이에 새로운 전문가와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다는 방식으로, 범죄의 신기술에 대한 호들갑이 이어지고 있다.

신종 범죄 우려는 1970년대부터, 신종 매춘은 1980년대부터 있었지만, 매번 새로움에 대한 숭배를 통해 사회는 거대한 마술환등(phantasmagorie)이 되었다. 특히 성매매에서 ‘신종’이라는 진단은 새로운 여성(new face)을 새로운 환경에서 체험할 수 있다는, 성구매의 욕망을 부추기는 홍보 문구로 작동했다. 여성과 관련된 사회 현상에 유독 ‘최초’, ‘신종’과 같은 섣부른 진단을 사용하는 것은 페미니즘 지식과 실천을 역사의 바깥에 놓는, 즉 젠더는 탈역사적이라는 인식을 강화할 뿐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범죄의 새로움을 우려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소수자의 의제가 나중으로 밀린 역사의 후과(後果)를 문제 삼고 있다. ‘한국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민주주의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컨대 1987년 민주화 직후 문화 표현물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사건의 한가운데 정태춘의 노래 ‘아, 대한민국’이 있었다. ‘새악시 하나 얻지 못해 농약을 마시는 참담한 농촌의 총각들은 말고 특급호텔 로비에 득시글거리는 매춘 관광의 호사한 창녀들과 함께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나’라는 가사를 정부 검열로부터 지키는 것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저항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동 성착취물이 유통되고 강간 모의가 이루어진 소라넷 사이트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소라넷 운영자는 회원들에게 ‘21세기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성인들의 볼 권리와 알 권리를 막으려는 시대착오적인 일’이 일어난다며 쪽지를 보냈다. 지금 페미니스트들은 민주 시민의 인간화가 ‘한국 여성’의 비인간화를 통해 달성된 역사를 질문하고 있다.

자연스런 호기심을 가진 사람 정도로 치부되곤 하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가담자, 익명 남성들의 네트워크는 피해자 여성의 구체적인 얼굴을 대면함으로써 탄생했다. 이들은 끝없이 새로운 여성의 얼굴을 포착하려는 성적 실천을 남성 본능으로 자연화하면서 옹호해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대면적 삶의 양식이 예견되는 코로나19 이후, 얼굴을 가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리얼’한 현실을 사는 여성들, 예컨대 가출 여성 청소년, 콜센터 노동자, 서비스직 노동자, 빈민, 성매매 업소 종사 여성에게도 동일한 미래가 허용될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관계성을 소거한 채 여성들을 ‘새로운 얼굴’로만 소비해온 남성 문화에 대한 총체적 재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주희(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