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패배 보수진영의 부정선거 음모론
비웃기는 쉽지만 자기오류 반성 어려워
선동에 속지 않으려면 성찰 계속해야
보수 유튜버들이 이념의 대척점에 있는 방송인 김어준씨와 통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나. 현실이다. ‘20억원 모금’ 깃발을 들고 21대 총선 사전투표 조작 의혹 제기에 앞장선 가로세로연구소는 김씨가 제작한 영화 ‘더 플랜’을 ‘소름 끼치는’ 근거로 내민다. 영화가 다룬 18대 대선에서의 개표 조작 근거들이 이번 총선의 부정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보수 참패에 실망한 이들의 현실 부정, 이 심리를 노린 유튜버들의 펀딩 사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귄위를 인정받는 물리학자ᆞ통계학자, 선거 부정을 전문적으로 찾아내는 미국 대학 교수까지 가세해 혼란을 키운다. 이들의 오류는 대체로 단순 잘못에서 비롯된다. 물리학자인 박영아 명지대 교수는 서울 424개 동(洞) 사전투표에서 민주당 득표율이 모두 높게 나올 확률이 ‘2의 424승분의 1’이라며 조작을 확신했다. 어마어마한 숫자에 압도당하기 쉽지만, 사실은 사전투표자의 투표 성향이 당일 투표자와 같을 것이라는 잘못된 전제에서 나온 틀린 결론일 뿐이다.
이런 선동에 힘입어 낙선한 민경욱 미래통합당 의원은 4ᆞ15 총선 무효소송을 냈다. 음모론은 이렇듯 사회적 비용 지출을 초래한다. 통합당이 진짜 패배 원인을 탐색하고 쇄신하는 것을 방해한다. 유튜버에 속아 모금에 동참할 이들의 피해는 자기 책임이라고 치자.
부정선거 음모론은 반향이 크지 않아 자연히 소멸하겠지만,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지금 민 의원과 보수 유튜버를 비웃는 것만큼 쉽게, 그 영감의 원천인 ‘더 플랜’을 반성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2012년 대선이 부정선거라고 열렬히 주장했던 진보 진영의 일부는 스스로 오판을 인정하고 있을까. 혹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더 플랜’은 ‘자동개표기로 분류된 표와 미분류된 표의 후보 지지 성향이 같아야 한다’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개표 조작 의혹의 원조다. 이번 총선 음모론의 불쏘시개가 된 것을 보면 해악이 작지 않다. 김씨는 ‘더 플랜’의 오류를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최근 보수 유튜버들에 대해 “본인들이 무슨 주장을 하는지 스스로 이해 못하고 있다. (개표 과정에 대해) 잘 모르면 말하지 마라”고 비난하기만 했다.
선동의 효과가 소수 팟캐스트ᆞ유튜브 구독자에 머물지 않고 국민 대다수를 사로잡을 경우 결과는 끔찍하다. 나치즘이 너무 심한 예라면 15년 전 세계를 뒤집어 놓은 황우석 사건을 떠올려 보자. 서울대가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전까지 여론은 황 박사를 일방적으로 지지했다. ‘YTN 청부 취재’로 대변되는 황 박사와 언론의 합작이 진실 은폐에 앞장섰고 상당수 과학자와 정부 관계자들이 거들었다. 우상과 선동가들이 키운 맹신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거센 시청자 항의와 불매운동 압박에 PD수첩은 폐지 위기에 처했다. 논문 조작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사실을 보도한 뉴스는 주목받지 못했다. 그때도 김씨는 일방적으로 황 박사를 옹호했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을 지낸 유시민씨는 “PD수첩이 검증에 나서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비난했었다. 이들은 조국 사태 때 사실을 해체ᆞ재구성하는 선동의 기술을 또 한번 발휘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지지하는 것은 자유지만 서로의 신념을 존중받으려면 객관적 사실은 그 자체로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이제 가슴에 손을 얹고 각자의 위치를 되짚어 볼 때다. 반복되는 선동과 맹신의 역사에서 나는 어느 편에 서 있었는지. 따져보지 않고 황 박사를 지지한 쪽이었는지, ‘더 플랜’을 비판적으로 검증한 뉴스타파에 비난 댓글을 달았었는지, 2012년 대선과 2020년 총선의 부정선거 의혹을 같은 잣대로 판단하는지. 인간 이성은 취약하기 짝이 없다. 자기 경험, 신념, 믿을 만한 지인을 인지적 지름길로 사용하도록 진화했다. 고학력자나 전문가도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다. 자기 세상에 빠져 비웃음을 사지 않는 최선의 길은 끊임없이 성찰하는 것이다.
김희원 논설위원 he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