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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청, 허허실실… 가벼운 듯 진지한 배우 하정우

입력
2020.05.08 04:3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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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제기의 영화로운 사람] <5> 하정우 

 ※ 영화도 사람의 일입니다. 참여한 감독, 배우, 제작자들의 성격이 반영됩니다. <영화로운 사람>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가 만나 본 국내외 유명 영화인들의 삶의 자세, 성격, 인간관계 등을 통해 우리가 잘 아는 영화의 면면을 되돌아봅니다. 

배우 하정우. 세상의 풍향에 따라 낭창낭창 흔들리면서도 자기 중심을 잃지 않는 대나무 같은 배우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배우 하정우. 세상의 풍향에 따라 낭창낭창 흔들리면서도 자기 중심을 잃지 않는 대나무 같은 배우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2년 배우 하정우와 술자리를 함께 했을 때다. 그는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매니저와 단둘이 경차를 타고 나타났다. 그날 소속사에서 사용 가능한 유일한 차라고 했다. 하정우는 “경차를 타면 창문을 내릴 수도 있는 등 오히려 편하다”고 했다. 지나가던 옆 차 운전자가 설마 자신을 유명 배우로 알겠냐는 이유에서였다. 그날 술 몇 잔이 돈 후 자리를 옮기려 했다.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난감했다. 초봄 추운 밤이라 더 그랬다. “버스 타고 가시죠.” 하정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버스를 타자 승객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승객들은 얼마 되지 않아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버스를 내린 후에도 15분 정도 인사동 한복판을 걸었다. 그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릴수록 사람들은 누굴까 더 궁금해 한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면 오히려 눈길을 끌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허허실실’은 그의 처세술 중 하나였다.

하정우를 처음 만난 건 2006년 가을이다. 뮤지컬 영화 ‘구미호 가족’ 개봉을 맞아 인터뷰를 하면서였다. 하정우는 2005년 출연작 ‘용서받지 못한 자’가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면서 영화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윤종빈 감독의 데뷔작이자 윤 감독의 중앙대 영화학과 졸업 작품이었다. 기성 감독도 평생 한 번 가기 힘든 칸영화제에 대학 졸업 작품이 초대받았으니 큰 화제가 됐다. 윤 감독의 연출력이 빼어났지만, 군필자라면 더 공감할 만한 하정우의 연기가 영화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마침 ‘구미호 가족’에서의 연기도 그에 대한 호기심을 키웠다. 그는 산골에 살다 도시로 나온 구미호 집안의 아들을 연기했다. 안면근육을 최대한 활용해 만들어 낸 표정들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양쪽 윗눈썹은 기분에 따라 극단적으로 하강하거나 상승했는데,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그 표정마다 연기에 대한 야심이 배어났다.

첫 만남이 남긴 뚜렷한 기억은 두 가지다. 하정우는 디지털카메라 시대에 필름카메라를 들고 한국일보사를 찾았다. 그는 “찍은 결과물을 확인할 때까지 기다리는 재미가 있어 필름카메라가 좋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 그는 어렵게 말을 꺼내며 이런 부탁을 했다. “배우 김용건의 아들이라는 점이 언급이 안 됐으면 좋겠어요. 제 스스로만 평가받고 싶거든요.” 배우로서의 욕심이 느껴졌고, 그 세대답지 않은 아날로그 감성이 흥미로웠다.

어려서부터 배우를 꿈꾸던 하정우는 생활이 연기였다. 중앙대 연극학과 재학 시절 연극 ‘맥베스’의 주연을 맡은 적이 있다. 그는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연습실 밖에서도 맥베스처럼 칼(물론 장난감)을 차고, 가짜 수염을 붙이고 다녔다. 여자친구랑 카페에서 차를 마실 때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도 맥베스 복장이었다. 여자친구가 “같이 다니기 창피하다”며 이별 통보를 해도 끄떡하지 않았다고 한다.

'구미호 가족'의 하정우. 야심찬 젊은 배우의 패기가 엿보인다. 명필름 제공
'구미호 가족'의 하정우. 야심찬 젊은 배우의 패기가 엿보인다. 명필름 제공

영화 ‘추격자’(2008)의 연쇄살인범 지영민을 연기하며 스타덤에 올랐지만, 하정우를 만나면 가장 떠올리기 힘든 캐릭터가 지영민이다(배우 박보영은 멀리서 하정우를 보고 도망쳤다고 하지만). 여러 자리에서 마주한 그는 능청스럽고 넉살 좋으면서도 영화와 연기 이야기가 나오면 순식간에 진지해지는 인물이었다. 고약하다 싶을 정도로 장난기가 심하다. 술을 마시다 졸고 있는 사람이 나중에 깨어나면 깜짝 놀라게 하겠다며 매니저에게 머리 염색약을 구해 오라고 한적도 있다. 떼인 돈을 받으러 온 옛 여자친구를 미소로 반기는 병운(‘멋진 하루’),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선 “폭발하는 화산 속으로도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은 주월(‘러브픽션’), 돈만 밝히는 척 위악적이고 능글능글한 하와이 피스톨(‘암살’), 붕괴한 터널 속에 갇혀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정수(‘터널’), 전역을 앞두고 가족을 위해 사지로 향하는 인창(‘백두산’), 그 어디쯤에 하정우가 있다. 요컨대 그는 세상 풍향에 따라 낭창낭창 흔들리면서도 자기 중심을 잃지 않는, 대나무 같은 배우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하정우는 감독인 동시에 엔터테인먼트 사업가다. 그가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는 영화는 ‘허삼관’(2015)이다. “연출과 주연을 겸하며 혼신을 기울인 작품”이라서다. 하정우는 영화제작사 퍼펙트스톰필름, 매니지먼트사 워크하우스컴퍼니를 각각 설립하기도 했다. 퍼펙트스톰필름은 이병헌이 주연한 ‘싱글라이더’(2017)를 시작으로 ‘PMC: 더벙커’(2018), ‘백두산’(2019), ‘클로젯’(2020)을 제작했다. 영화와 연기에 대한 욕심이 만들어 낸 결과물들이다.

최근 하정우는 휴대폰 해킹범과의 사연으로 세간에 화제가 됐다. 해킹범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시간을 끌며 밀당을 주고받는 카카오톡 대화 내용은 하정우답다. 그는 프로포폴 불법 투약 의혹을 받고 있기도 하다. 흉터 치료를 목적으로 한 합법적인 투약이었다고 주장하나 동생과 매니저의 개인정보로 병원을 이용해 의혹을 부추겼다. 하정우답지 않다. 그가 의혹을 털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더 좋은 연기와 연출을 보여 줬으면 좋겠다. 하정우답게 말이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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