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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엄마의 마지막 로마 여행

입력
2020.05.08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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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한산한 모습을 보이는 이탈리아 로마의 스페인 계단. 연합뉴스
코로나19로 한산한 모습을 보이는 이탈리아 로마의 스페인 계단. 연합뉴스

“안녕, 로마. 언제 다시 너를 보겠니.” 일년 전 로마를 떠나는 공항버스에서 엄마는 또 마지막 유언처럼 중얼거렸다. 언젠가부터 엄마의 말에는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했다. 냉장고를 바꿀 때도 이게 내 생애 마지막 냉장고겠지 라고 했고, 발리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도 이렇게 같이 오는 건 마지막이겠지라고 했다. 자기도 모르게 문득 인생의 끝을 떠올리면서 살게 되는 노년의 일상으로 엄마는 조금씩 옮겨가고 있었다.

이십 년 만에 로마를 다시 찾은 일흔 나이의 엄마는 여행 내내 우울했다. 명색이 작가인 딸보다 독서량이 많은 엄마가 인생의 명작으로 꼽는 책들은 주로 로마와 관련한 역사서였다. 그런 엄마에게 이탈리아 로마는 자주 갈 수 없는 먼 나라지만 언제나 그리운 도시였다. 하지만 이십 년 사이에 로마는 달라져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 세상을 만나는 엄마가 달라져 있었다. 살아 있는 역사 교과서와도 같은 포로 로마노에서 고대 로마의 발상지인 캄피돌리오 언덕까지 이어지는 산책로에서는 근사한 풍광이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아픈 다리가 먼저 괴롭혔다. 콜로세움을 만나도 가슴이 뛰지 않는 자신을 바라보며 이제 감동을 느끼는 기관마저 늙어버렸나 서글퍼졌다. 그나마 팔팔했던 오십대에 만났던 로마의 모습을 끝으로 기억하는 게 더 나았겠다, 계속 후회였다.

지난 시간 동안 로마의 여행 풍경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앤 공주가 젤라토를 먹으며 앉아 있던 스페인계단도 그러했다. 엄마가 처음 스페인계단을 만났던 날에는 패션쇼 리허설을 하는 모델들이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한때 화가에게 발탁되길 바라며 모델 지망생들이 모여들었던 18세기 예술계의 핫플레이스다운 행사였다. 화가들이 떠난 자리를 대신 채운 현대의 관광객들은 오드리 헵번처럼 젤라토라도 하나 들고 앉는 게 유행이었는데,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단속을 하더니 작년부턴 너무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앉는 것조차 금지였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적 하나 없이 텅 빈 계단만 남았으니, 변화란 실로 천둥처럼 온다.

엄마와 여행한 것을 한편으로는 후회한다. 일 때문에 해마다 들러야 하는 도시 구석구석에 엄마의 기억이 남겨진다는 건 축복이자 예정된 고통이다. 맛있다며 눈이 동그래지던 그 젤라토 가게에서, 걸어도 걸어도 지루하지 않다던 그 골목에서 불쑥불쑥 엄마가 나타날 텐데, 아마 눈물 몇 번은 쏟아내지 않을까 미리부터 걱정이다. 부모 맘에는 영 차지 않는 매정스러운 자식들도 하루하루 마지막일까 두려운 날이 늘어난다는 것을 혹시 아실까? 어느 전화 통화가 예기치 않은 작별인사가 될지 몰라 가끔은 녹음을 하기도 하고, 생전의 모습을 최대한 남기라는 선배들의 조언에 어색하지만 동영상도 슬쩍 찍어본다. 부모 역할은 처음이라서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을 엄마처럼, 나 역시 딸 노릇은 처음이라 놓치고 나면 애석할 일 투성이다.

참으로 노인에게 혹독한 시절이었다고 기록될 2020년이다. 늙고 병약한 자에게 유난히도 지독하게 구는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많은 어버이들을 잃었다. 은퇴 후에도 대가족이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서 한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노인이라 꼽히던 이탈리아의 노년층도 예외는 아니었다. 틈날 때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가 안부를 전하고 다같이 식사하는 다정한 문화였는데, 혹여 자신이 조부모를 병들게 한 원인은 아닌지 자책해야 하는 슬픈 기억도 생겨났다. 요양원에 고립된 채 죽어간 어르신들 역시 자식세대에게는 지울 수 없는 마음의 빚이다. 부모의 나이가 되어 봐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부모자식 간의 시차를 따라잡기에도 충분치 않은 시간에, 한 세대가 참 기막히고 뼈아픈 방식으로 사라지고 있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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