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분야 글로벌 기준 맞출 듯… 노조 교섭 요구 응할 전망
“더 이상 삼성에서 ‘무노조 경영’이란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그룹 창사 이래 80여년간 내려온 그룹내 ‘무노조 경영원칙’을 폐기한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11월 전국적 규모의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산하 삼성전자 노동조합이 정식 출범하면서 사실상 무노조 경영은 깨졌지만, 총수의 입으로 다시 한번 확실하게 폐기 선언을 약속한 셈이다. 노조와해 사건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그룹내 실질적인 오너의 분명한 입장표명을 요구한 삼성준법감시위원회(준법위)의 권고를 적극 수용한 모양새다.
이 부회장은 6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갖고 “노사의 화합과 상생을 도모하고 건전한 노사문화가 정착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삼성은 지난해 12월 삼성전자서비스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해 회사가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이유로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과 강경훈 삼성전자 부사장 등 전·현직 임원 다수가 1심에서 실형선고를 받은 바로 다음날 삼성전자 및 삼성물산 이름으로 노조와해 공작 재발방지를 약속한 사과문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준법위에선 이 부회장의 직접적인 사과를 요구했고 이날 육성으로 노조를 공식 인정했다.
재계 안팎에선 이 부회장의 이번 입장 표명이 ‘기술 초격차’를 내세우면서 스마트폰과 TV 등에서 세계 1위에 올랐지만 이젠 질적 성장도 미룰 수 없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에 정통한 재계 고위 관계자는 “삼성이 내부에서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에 갇혀 외부의 시선에 둔감했고, 그로 인해 나쁜 선례를 남겼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며 “상대적으로 미진했던 노조 분야의 경우엔 글로벌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바로 잡자는 취지에서 이 부회장의 이번 입장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 부회장의 의지가 확인되면서 삼성도 조만간 노조의 교섭 요구에 응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를 비롯해 한국노총 산하 삼성 노조들은 임금 및 단체협상(임단협)을 진행 중이거나 사측에 교섭을 요구하고 있다. 이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 직후 한국노총은 논평을 통해 “굳이 이 부회장의 사과를 평가절하 하고 싶지는 않지만 문제는 실천이다”며 “삼성이 즉각 성실하게 교섭에 나서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다만 아직까지 주요 요구 내용이 노조 사무실 제공, 교섭위원 타임오프제 적용(노조활동 보장) 등의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 노조 활동의 기본적인 틀을 안착하는 단계부터 진행될 전망이다.
재계에선 이 부회장이 무노조 원칙 폐기에 이어 “노사관계 법령을 철저히 준수하고 노동3권을 확실하게 보장하겠다”고 발언한 것에 주목하고 있다. 노조를 공식 인정하면서 법 테두리 안에서의 보장을 언급했다는 건 앞으로 노조 생명력의 공을 삼성이 아닌 노동계로 돌린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결국 노조는 임직원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노조의 존재감이 없었던 이유로 삼성의 노조 와해 의혹 등이 주로 부각됐다면, 이 부회장의 이번 선언에 따라 노조의 성격과 요구사항 등으로 관심이 옮겨가는 효과도 두드러질 것이란 시각에서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노조를 인정한다는 것과 노조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다른 문제다”라며 “삼성은 관련 법령상 근로자의 권익과 처우 개선이 사유일 때의 노조 활동이 인정되는 측면을 강조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전자 국내 임직원만 10만명이고 계열사까지 합치면 20만명인데, 가장 규모가 큰 한국노총 산하 노조도 수 백명 수준에 그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주로 개발, 마케팅, 영업 등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은데 노조가 얼마나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내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고 덧붙였다.
맹하경 기자 hkm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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