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검은 색 일색의, 변화를 주기 위해 농담(濃淡)을 집어넣는다 한들 거칠고 딱딱한 느낌의 그림이 상상된다. 하지만 ‘숯의 작가’ 이배는 그 숯으로 보드라우면서도 기운찬 곡선을 그려냈다. 달맞이고개에 있는 부산 중동 조현화랑에서 지난달 16일부터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이배 작가는 숯으로 그려낸 수묵화들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이 작가가 선보이는 최근작은 ‘드로잉(Drawing)’ 시리즈다. 숯가루를 물에 섞어서 붓으로 그려낸 그림이다. 수묵화처럼 은은하게 배어들고 번져나가는 모양새가 꼭 먹으로 낸 물길 같다. 숯으로 그린 그림치곤 부드럽고 유려한 느낌이다.
이 작가는 겸재 정선의 부드러운 그림에서 힌트를 얻었다 했다. 덥고 습한, 한국 특유의 풍토가 겸재의 그림을 만들어냈다고 봤다. 쓰는 재료가 숯이라고 작품이 거칠고 황량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얘기다.
이 작가는 30여년간 숯으로 작업해와 지금에야 ‘숯의 작가’라 불리지만, 원래 서양화 전공자였으니 검은 색과는 별로 친할 일이 없었다. 그러다 숯에 천착하게 된 건 프랑스 유학 경험이었다. 1990년대초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다 차별화된 자신만의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고, 그 때 집어 든 것이 프랑스 현지의 바비큐용 숯이었다.
기회는 금세 왔다. 당시 저명한 미술 비평가 앙리 프랑수아 드바이유가 작업실을 찾은 것. 매력적인 신진 작가를 찾고 있던 드바이유의 눈에 이배의 숯 작품이 눈에 띄었다. 물론 이 작가가 가만 기다렸던 것만은 아니다. 스스로 ‘왜 난 숯을 택했는가’ 되물은 뒤 “나는 거대한 수묵 동양화, 수묵의 문화권에서 왔다” “숯은 단순한 검정이 아니고, 불로부터 왔기에 그만한 에너지가 있다”는 답변을 준비했다. 이 작가의 답변은 드바이유를 매료시켰고, 드바이유는 그를 프랑스 미술계 중심부로 이끌었다.
이후 숯은 이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이 작가는 “한국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한국적인 것을 계속 작업해나갈 것”이라 말했다.
이번 전시에선 최근작 드로잉 시리즈뿐 아니라, 그간 작업 흐름도 한 눈에 볼 수 있다. 숯을 잘라 캔버스에 붙인 뒤 이를 갈아 만든 ‘불에서부터(Issu du feu)’, 숯가루를 두텁게 바르는 ‘풍경(Landscape)’ 시리즈 등이다. 이번 전시는 서울, 제주에서 함께 시작됐다.
부산=임수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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