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39>중국 속 한민족 문화 ③ 지안 고구려 유적과 송강하 표류
단둥에서 지안(集安)을 잇는 단지선(丹集綫)을 달린다. 콴덴(寬甸)을 가로질러 훈강구대교에 이르러 훈강 표지석이 나오자 잠시 정차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은 부여에서 훈강인 비류(沸流)를 따라 남하한다. 개국 도읍지 홀본(忽本)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져 있다. 대교를 건너면 지안이다. 랴오닝에서 지린으로 성(省)이 변경된다. 도로도 지단선(集丹綫)로 명칭이 바뀐다. 강렬한 햇볕이 강물을 끓이는 듯하다. 비류는 그냥 단순한 강이 아니다. 가슴을 용광로처럼 지피는 힘이 있다.
다리를 건너 동북 방향으로 70km를 가면 지안이다. 기원후 3년, 고구려 2대 유리왕이 도읍을 옮긴 국내성이다. 시내 한복판에 성터가 남아 있다. 2007년 처음 찾았을 때 조선족 기사는 어릴 때 뛰어놀던 장소가 고구려 성벽이어서 놀랐다고 했다. 지금은 고구려 유적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면서 접근하지 못한다. 국내성의 서남쪽 누각 자리였다는 설명이 있다. 전쟁이 벌어지면 북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산성으로 피신했다. 약 600m 높이의 뒷산은 요새였다. 위나암성(尉那巖城)이라 불렸던 환도산성(丸都山城)이다.
예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산 아래에 고분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지금은 완전히 잘 만들어진 관광지로 변했다. 입구 건물도 깔끔하다. 판화 이미지로 새긴 산성 모습도 인상 깊다. 지도도 보기 좋게 만들었다. 중국어 아래에 영어와 한국어, 일본어로 적었고 키릴 문자로 쓴 러시아어도 있다. 정돈된 길을 따라 오르니 산 아래를 감시하는 점장대(點將臺)가 나온다. 수졸거주지(戍卒居住地)도 있다. 비가 내린 후라 바위도 산뜻해 금방 지은 유적처럼 깨끗하다. 언덕을 완만하게 오르니 멀리 궁전 유적이 보인다. 보안 담당자가 졸졸 따라온다. 사진 촬영을 금지하지는 않지만 단체 행동을 관찰한다. 가끔 한국인이 현수막을 펼치고 ‘고구려’를 외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궁전은 약간 경사진 평지에 지었다. 쓰레받기 모양으로 짓는 건축 방식을 파기형(簸箕型)이라 한다. 궁전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산성은 6,951m에 이른다. 동서로 짧고 남북으로 긴 타원형이다. 서쪽은 산세가 험하고 정문인 남쪽은 에스(S) 자로 흐르는 통구하(通溝河)가 자연스레 해자 역할을 한다. 천연의 요새다. 궁전 역시 명당이다. 주춧돌이 박혀 있고 건물 뒤로 나무 계단을 설치했다. 돌 위에 걸터앉아 한참 동안 아래를 바라본다. 평지에 궁전을 두고 가까운 거리에 이궁(离宮)을 두는 경우가 중국 역사에 존재하는지 궁금해진다. 주변 부족과 쟁투를 거치며 고대국가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를 만나러 간다. 동북쪽으로 4km가량 떨어졌다. 424년 동안 도읍지였던 국내성 주변에 고구려 고분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주로 하오타이왕베이(好太王碑)라고 한다. 비문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다. 고구려 국왕 중 유일하게 확인된 완전한 묘호로 판단된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이라 전하지만 고구려 부흥을 이끈 위대한 대왕으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장수왕이 부왕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세웠다고 알려졌다. 삼국유사에는 광개토대왕의 이름인 담덕(談德)으로 기록돼 있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 성씨까지 붙이면 고주몽이듯 그냥 고담덕이라 해도 좋다. 오히려 친근한 느낌이다.
1928년에 지안의 관리이던 류텐청이 2층 높이의 전각을 처음 만들었다. 1982년에 새로 단층 누각으로 변경했다. 유리로 사방을 막았다. 밖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있으나 안에서는 찍지 못한다. 비석은 화산 작용으로 분출된 응회암으로 제작됐으며 4면에 적힌 비문의 글자가 1,775자다. 비문 해석에 이견이 있어 글자수도 약간의 오차가 있다. 높이는 6.39m이고 최대 너비는 2m이며 측면도 1.4m가량으로 다소 불규칙하다. 원석이 지닌 형태를 그대로 활용했기 때문인데 우리 역사에서 발굴된 크기로는 최대다. 추모왕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신화가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먼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의 기틀을 세우시었다. 북부여에서 오신 천제의 아들이시며 어머니는 물의 신인 화백의 딸이시다. 알을 깨고 탄생하셨고 성덕이 있으시어 ㅇㅇㅇㅇ. 수레를 타고 순행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부여의 엄리대수를 거치시었다. 唯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郞剖卵降世生而有聖德□□□□□命駕巡幸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
왕이 나루터에 도착하시어 말씀하시길 나는 천자의 아들이고 어머니가 화백의 딸로 추모왕이라 하노라. 나를 위해 자라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라고 하시었더니 곧바로 자라가 연결되고 거북이가 떠올랐다. 그리하여 도강하여 비류곡 홀본 서쪽에 산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시었더라. 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郞鄒牟王爲我連浮龜應聲卽爲連浮龜然後造渡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
인간 세상의 직위에 만족하지 않으시니 하늘에서 황룡을 보내 왕으로 영접하시었다. 왕이 홀본 동쪽 언덕에서 황룡을 타고 승천하시며 세자 유류왕(2대 유리왕)에게 나라를 도리에 맞게 다스리도록 고명을 내리시었다. 대주류왕(3대 대무신왕)은 나라의 기틀을 이어받으셨고 17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게 미치게 되었음이라. 焉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岡黃龍負昇天顧命世子儒留王爾興治大朱留王紹承基業遝至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제1면 1행부터 4행에 이르기까지 도도하게 이어온 고구려의 전통이 전해진다. 제2면, 제3면, 제4면에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능원 관리에 관한 내용도 있다. 마지막 행에는 묘를 전매할 수 없고 부자라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고 했다. 어길 경우 판매한 자에게 형벌을 내리라 했다. 구매한 자에 대한 지적과 제령수묘(制令守墓)에 대한 기록도 있다. 법에 정해진 명령에 따라 묘를 지키라는 명령이다. 안타깝게도 고구려의 후손인 우리가 명령을 수행하기 어렵다. 중국 땅에 갇혀 있는 최고의 국보다. 유리문 밖에서 사진을 찍었다. 빛이 약간 반사되긴 해도 1,500년 전 역사를 생각하며 고개를 숙인다.
비문 부근에 왕릉이 있다. 약 400m 떨어져 있다. 가볍게 5분 정도 걸어가면 돌무지무덤이라 부르는 적석총이 나타난다. 능원에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 새긴 벽돌이 출토돼 태왕릉이라 부른다. 세월이 흘러 낮아진 능원의 잔고가 14.8m이며, 한 변이 66m에 이른다. 계단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봉긋하게 솟아있는 왕릉 입구와 만난다. 광개토대왕의 왕릉으로 비정한다. 2m가 채 되지 않는 너비에 약 5.4m 안쪽에 석실과 석곽이 있다. 왕과 왕비의 무덤 한 쌍이 나란히 놓여 있다. 무덤 안에서 고구려 와당을 비롯해 금동, 청동, 철기, 토기 등 1,000여 종의 유물이 출토됐다. 석실 밖에 잘 다듬어진 봉묘석을 한군데 모아 놓았다. 오랫동안 능원을 지탱한 돌이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병사처럼 보여 애잔한 마음이 든다.
광개토대왕비에서 1.7km 떨어진 장군총을 찾아간다. 중국은 ‘장군분’이라 부른다. 입구를 지나니 거대한 무덤이 시야에 들어온다. 깔끔하게 정돈된 작은 공원 같은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다. 모두 1,100여 개에 이르는 화강암으로 7층 높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크기가 조금씩 작아진다. 오목하게 홈을 파서 서로 견고하게 연결했다. 천년 세월이 지나도 자태를 유지하는 이유다. 무덤이 밀려나지 않도록 1층 바닥에 5m 정도인 호분석이 받치고 있다. 각 면에 3개씩 모두 12개였는데 뒤쪽 1개는 사라졌다. 파란 하늘이 장군총을 더욱 웅장하게 보여주니 어찌 사진으로 남기지 않겠는가. ‘고구려의 후손이 다녀가다’는 환호성을 지른다. 가까이서 보니 돌 사이에 이름 모를 풀과 꽃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
장군총은 장수왕 능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광개토대왕 19년인 409년에 태자로 책봉됐고 413년에 즉위했다.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고구려 영토를 최대로 확장하고 98세까지 장수했다. 중국 중원은 남북조시대 전반기였다. 남쪽에는 한족 정권인 유송이 통치했고 북쪽에는 척발씨(拓跋氏) 선비족이 세운 북위가 할거했다. 장수왕의 이름은 거련(巨連)이다. 이름처럼 대왕의 업적을 남겼다. 제대로 손질된 돌이 차곡차곡 쌓여 전체 무덤이 웅장하다. 멀리서 보면 반듯하고 가까이에서 보면 단정한 느낌이다.
국내성이나 평양성이 도읍일 때 백두산은 고구려 영토였다. 민족의 영산을 향해 간다. 지린에서 바이산(白山)까지 2시간 반이 걸린다. 바이산에서 백두산을 가려면 푸쑹현을 거쳐야 한다. 둥강진으로 빠져 송강하(松江河)를 찾는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흐르는 강으로 송화강(松花江)과 합류한다. 송화강은 중국 7대 하천으로 1,900km를 흐른다. 여기에 천연의 강물을 따라 표류하는 코스가 있다. 큰길에서 10분가량 들어가니 맑은 강물이 흐른다. 울긋불긋한 고무보트를 탄다. 노를 젓지 않아도 저절로 서서히 내려간다. 완전 자동이다. 강폭이 좁아 이리저리 흐르다가 부딪히곤 하는데, 곧 제대로 방향을 잡아 다시 떠내려간다.
보트가 자꾸 강바닥에 닿는다. 엉덩이가 바닥에 부딪히면 아프다. 마찰하지 않도록 보트 양 끝 볼록한 자리에 앉아야 한다. 잔잔하게 흐르는 구간에 이르면 보트에 누워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본다. 강변에 자란 푸르른 나무는 파란 하늘과 어울려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나무는 강 양쪽을 넘나들며 자란다. 나무 밑으로 보트가 지나가기도 한다. 1시간가량 강물 유람 중에 경사가 가파른 구간도 몇 군데 있다. 쿵쾅거리며 빠른 속도로 내려가면 모두 환호성을 지른다. 보트 안으로 물이 차오른다. 바가지로 퍼서 밖으로 버려야 한다. 옆 보트와 물싸움을 해도 재미있다.
너무 시끄럽게 놀면 물오리가 도망갈 수도 있다. 1급수에만 서식하는 물고기 사냥에 방해가 된다. 강바닥 수초가 보이는 구간을 지난다. 연둣빛을 머금은 수초는 하류 방향으로 일제히 누웠다. 봉황의 깃털처럼 보인다. 한바탕 상쾌하게 하늘을 날아갈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백두산 천지의 신비가 투영된 송강하와 한 몸이 된 느낌이다. 이제 백두산으로 올라가려고 한다. 천지의 영롱한 기운을 고스란히 만끽하고 싶은 기대로 점점 흥분된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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