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에 의사세트 여아는 뷰티세트… 성고정관념 강화하는 장난감들
묻지도 않고 어린이날 선물로 줘… 부모들 “평등하게 키우기 힘들어”
“남자 아이들은 의사 놀이 세트를 주면서 여자 아이들에게는 뷰티 세트라니요.”
경기 안성시에 사는 A(34)씨는 지난 4일 두살배기 딸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받아 온 선물을 두고 학부모들과 이야기하다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남아들에게는 청진기ㆍ수술기구 장난감이 든 병원놀이 세트를 주면서, 여아들에게는 각종 화장품 장난감이 든 뷰티놀이 세트를 줬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둘 중 어떤 선물을 골라 갈지를 묻지도 않았다. A씨는 “평소에도 어린이집에서 ‘여아답게 조신하다’ ‘남아들을 참을성 있게 돌봐준다’ 등의 표현을 써서 여러 차례 항의를 했다”며 “아이에게 성고정관념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데 아이가 ‘왜 나는 병원놀이 세트를 못 받았냐’고 묻자 답할 말이 없었다”고 답답해 했다.
사회적 성인지 감수성이 높아졌다지만 여전히 전통적 성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어린이날 선물’이 쏟아지고 있다. 학부모와 전문가들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성고정관념을 내면화하고 스스로의 가능성을 제한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어린이날인 5일 서울 송파구의 한 대형마트의 완구 코너에는 성고정관념을 반영된 장난감이 수북했다. 장난감 포장 박스에 남아가 그려진 장난감의 경우 경찰ㆍ의사ㆍ중장비 기사 등 ‘직업’과 관련한 것이 대부분인 반면, 여아가 모델인 장난감은 엄마ㆍ주부ㆍ화장 등 ‘가사’에 맞춰진 경우가 많았다. 여아를 대상으로 한 엄마놀이 장난감에는 “아기 돌보기의 소중함을 알려준다” “착한 마음을 길러준다” 등의 전통적 여성상을 강조하는 설명이 적혀있기도 했다.
학부모들은 일찍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성고정관념을 주입하는 환경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갈 길은 멀다. 장난감뿐 아니라 만화, 유튜브 같은 콘텐츠 제작자 등도 여전히 성 이분법적인 가치를 주입해 아이들이 이를 자연스레 좇게 되는 탓이다.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이 지난해 국내 방송 중인 TV 아동애니메이션 112개를 분석한 결과, 주인공 10명 중 7명 가까이(68%)가 남자로 설정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등장 인물 중 여성 캐릭터만 요리와 뜨개질을 하는 등 성 역할 고정관념을 조정하거나 외모 지상주의를 부추기는 내용도 54건에 달했다. 단체 사무국장인 장하나씨는 “학부모가 노력해도 기성 사회가 바뀌지 않으니 아이들을 설득하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이를 부모들은 어린이날 선물 고르기가 난감하기까지 하다. 아이들 스스로가 고정관념을 학습해버린 경우가 많아서다. 경기 화성시에서 4살 딸을 키우는 신모(33)씨는 “아이에게 성평등 개념이 반영된 장난감을 사주려 노력했는데 어느 날 어린이집을 다녀오더니 ‘파랑은 남자 애들 것’이라고 하더라”며 “아이가 싫다는 걸 강요할 수도 없어 오늘은 공주님 세트를 사줄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되레 학부모들이 교육기관보다 성인지감수성이 높아 ‘예민한 부모’가 돼가며 교육기관에 항의를 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어린 시절 성고정관념을 주입 받는 것은 한 아이의 가능성을 제한할 수 있는 만큼 교육계가 나서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종 기자 be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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