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회> 고상한 풍미에 높은 품질, 낭만적인 분위기까지 매력
1917년 덴마크 작가 카렌 블릭센은 남편 데니스와 케냐 나이로비 인근의 농가를 매입했다. 주황색 기와지붕의 이 농가는 스웨덴의 한 엔지니어가 지은 집이었다. 그녀는 1931년 모국인 덴마크로 떠났고, 이 집은 1964년 덴마크 정부가 케냐의 독립을 축하하는 선물로 케냐 정부에 기부했다. 다시 20년의 시간이 흐른 1985년 이 집과 커피 농장, 그리고 집주인인 카렌의 삶과 사랑을 다룬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만들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프리카에 대한 로망을 품게 한 영화. 이 영화의 성공으로 카렌의 농가는 이듬해 박물관으로 탈바꿈하여 외부인에게 공개됐다.
나이로비 동북쪽 방향에 위치한 키암부를 다녀온 이튿날 아침, 카렌 블릭센 박물관을 찾았다. 나이로비 도심에서 외곽으로 20㎞ 정도 떨어진 카렌 지역에 있다. 공원으로 변신한 박물관에서 커피 농장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단지 카렌이 사용한 트랙터와 철제 농기구들, 커피를 볶고, 분쇄하는 기구들과 찻잔 등에서 이 곳이 커피를 재배하고, 커피를 즐기던 곳이었음을 어렴풋하게 알 수 있을 뿐이다. 정원 한 귀퉁이에서 수십 년간 이 집을 지켜온 왜소한 커피나무 한 그루가 반가웠다.
농가 앞마당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으니 영화에서 석양이 지는 초원에 엽총을 들고 서 있던 데니스(로버트 래드포드 분)와 노란 경비행기가 홍학 떼를 가르며 호수위를 나르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떠올랐다. 어디선가 영화의 배경음악(OST)으로 사용됐던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K. 622)도 들려오는 듯하다. 아울러 카렌(메릴 스트립 분)이 커피 수확을 하는 인부들 사이를 분주히 오가거나 가래로 커피를 뒤집어 말리는 모습, 포대에 커피를 담는 등의 농장 일을 하는 장면들도 생각났다. 노동은 고되 보였지만, 영화 속 분위기 탓인지 낭만적으로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카렌은 이 농장에서 600그루의 커피나무를 재배했고, 모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13년동안 현지 주민들과 함께 커피농사를 지었다.
우리에게 케냐 커피는 낭만적이다. 에티오피아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초콜릿의 부드러움과 레몬의 산미가 한데 어우러진 고급스럽고 기품 있는 커피. 아마도 오스카상을 받은 이 영화때문에 그런 낭만적 감성이 더 베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케냐 커피는 한국인이 특별히 사랑하는 커피임에 분명하다.
국내에서 단일 원산지 원두만 추출하는 커피전문점뿐 아니라 대형마트에서도 산지별로 이름 붙은 커피를 찾으면 케냐 커피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브라질 산토스, 콜롬비아 수프리모, 과테말라 안티구아, 에티오피아 이르가체페(예가체프), 인도네시아 만델링 등과 함께 빠지지 않는 것이 케냐 AA다. 세계 6대 커피 중 하나로 손꼽히면서 그 중 가장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자리하고 있지만, 사실 국제 시장에서 케냐 커피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높지 않다.
케냐 커피 수확량은 매년 감소 추세다. 케냐는 2017년 약 4만톤을 생산해 커피 생산국 중 22번째 생산량을 기록했다. 이 정도의 생산량은 우리에게 커피 생산국인지도 잘 모르는 필리핀이나 베네수엘라 보다 적은 규모다. 하지만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케냐 커피는 2016년 2,300톤에서 2017년 3,300톤으로, 그리고 2018년 4,400톤으로 늘어났다. 2017년의 경우 케냐 전체 수출량의 8%를 한국인들이 소비했고 2018년에는 10%를 넘어섰다. 이는 에티오피아 2%, 콜롬비아 4%, 코스타리카 3%, 과테말라 2% 등 다른 커피 생산국의 한국 수출량과 비교하면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일본의 경우 아프리카 커피로는 에티오피아 다음으로 탄자니아산을 많이 수입하지만, 우리나라는 에티오피아에 이어 단연코 케냐를 선호한다. 우리 국민들의 케냐 커피 사랑이 그만큼 각별하다.
케냐는 19세기 후반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에티오피아를 통해 커피를 도입했다. 에티오피아의 가장 큰 커피 산지인 이르가체페와 시다모 지역이 케냐와 가까운 남부 지역에 위치해 있음을 감안하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수만, 또는 수십만 년 전부터 인간과 함께 했던 커피가 국경을 이웃한 케냐로 넘어온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니 말이다.
에티오피아의 커피가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반도의 예멘에 전달된 때가 9~10세기쯤이라는 점과 대서양을 건너 중미로 건너간 때가 18세기 초인 것과 비교하면 더욱 놀랍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케냐 국민들은 커피대신 주로 차를 마신다. 그 중에서도 일종의 밀크티라 할 수 있는 케냐 티를 많이 마신다. 심지어 커피를 생산하는 농장 사람들조차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나라에서 커피는 수출작물로 주로 재배된다. 물론, 수도인 나이로비에서는 좀 다르지만.
비교적 늦은 시기에 커피가 들어왔으나 20세기 서구 자본을 통해 성장한 케냐의 커피 산업은 합리적인 시스템 기반 하에서 생산과 유통상의 품질 관리가 잘 이루어져 왔다. 정부 산하기관인 케냐커피이사회(CBK)가 품종 개발이나, 경작에 대한 기술지도에 나서는 등 커피산업을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특히 케냐의 경매시스템을 통한 유통시스템은 케냐 커피에 대한 국제적인 신뢰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며칠 후 나이로비 시내에 위치한 커피 경매장(Nairobi Coffee Exchange)을 찾았다. 케냐 커피협회가 있는 건물로 왁자지껄한 주변의 풍경은 수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경매장 내부의 옥션 시스템은 한층 업그레이드돼 있었다.
케냐에서 생산된 대부분의 커피는 이 곳에서 경매로 거래된다. 전국 각 지에서 온 커피는 1주일 전 주요 딜러들에게 샘플로 송부된다. 아울러 이 곳 커피 경매장의 샘플 룸에서도 입찰을 기다리고 있는 수백 개의 커피 샘플들을 만나볼 수 있다. 글로벌 커피 유통 회사를 비롯해 라이선스를 가진 커피 딜러들은 경매장에 모여 희망하는 커피에 대해 입찰에 참여한다. 커피의 등급과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케냐 커피가 꽤 고가인 편이지만, 이 곳 경매장에서는 매우 저렴한 커피들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렇게 저렴한 커피의 샘플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잘 아는,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로 마시는 케냐 커피가 얼마나 높은 등급인지 알 수 있다.
이 곳 경매장에 올라오는 커피등급은 최고 등급인 AA부터 가장 낮은 수준인 SB나 UG 등급까지 15가지 정도로 나뉜다. 이런 등급 구분이 전부가 아니어서 가장 좋은 AA 등급 중에서도 품질에 따라 가격차이가 크다.
이날 오후 경매장 근처 케냐 현지의 한 딜러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 곳에는 키리냐가지역의 한 커피 생산자 조합에서 보내온 커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0여가지의 커피들에 대한 감별이 이뤄졌는데, 각각의 컵들이 보여준 뚜렷한 개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모두 한 지역조합에서 나온 커피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풍미의 차이는 다양했다. 대개 고도가 높은 곳에서 생산된 커피는 베리나 과일에서 느껴지는 산미가 강하고, 초콜릿의 풍미가 두드러진 것은 비교적 고도가 낮은 곳에서 재배된 것들이다. 높은 곳에서 재배한 커피가 낙찰 가격이 높은 편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과일과 초콜릿의 균형이 좋은 커피들이 좀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날 경험한 커피들은 모두 최상위 등급의 샘플들이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지만, 풍미의 차이는 확연했다. 만화방창(萬化方暢)이라고 했던가. 봄날에 온갖 생물이 흐드러지게 자라듯 다양한 풍미의 커피들을 접하다 보면 알고 있던 커피에 대한 지식과 정보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기분이 든다. 우리가 케냐 커피 또는 케냐의 특정 산지의 커피에 대한 전형성을 얘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래서 커피는 경험할수록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케냐 커피는 고급스럽고 낭만적이다. 비록 도시화와 개발로 인해 케냐 커피의 위상은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우리가 지구 반대편에서 케냐 커피의 그윽한 깊이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오랜 인류사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또한 얼마나 행운인가. 다양한 풍미를 자랑하는 케냐의 커피들 중에 내가 선택한 커피와의 인연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나이로비 시내 커피 딜러의 사무실을 나오면서 드는 생각은 복잡 미묘했다.
최상기 커피프로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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